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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관을 찾아서④]초대 沈當吉의 차그릇 「히바카리」

입력 | 1998-06-21 19:42:00


1603년 지금의 미야마(美山), 나에시로가와(苗代川)로 흘러들어온 후 4백여년, 심수관가가 지금까지 살고 있는 집은 무가(武家)풍의 가옥이다.

수관도원(壽官陶苑)이라는 나무 현판 밑으로 ‘대한민국명예총영사관’이라는 동판과 사쓰마야키 14대 종가 심수관이라는 문패가 나란히 대문 양쪽에 걸려 있다. 대문 뒤쪽으로 매화나무와 대숲이 바라보인다.

집안으로 들어서면 발밑에서 굵은 모래가 밟히는 소리만이 서벅서벅 고요를 흔든다. 마치 미로찾기처럼 대나무 울타리가 쳐져 있는 좁은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왼쪽으로 옛 풍모를 느끼게 하는 안채가 있고 맞은편이 하얀 벽체를 한 수장고(收藏庫)다. 그리고 마주 보이는 곳, 몇 년이 되었을까 짐작이 가지 않는 감나무가 하늘을 덮고 있는 그늘 속에 전시실이 있다. 주로 공방에서 제작한 소품들을 팔고 있는 곳이다.

이 집은 도쿠가와(德川)막부시대 삼근교체(參勤交替)로 도쿄와 가고시마를 오가던 번주(藩主) 일행이 묵어가던 곳이다. 삼근교체란 각 번(藩)의 번주들을 도쿄에 3년, 자기 번에 3년씩 돌아가며 머물게 했던 제도였다. 지방 영주들의 모반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 시절 도쿄로 향하는 번주 일행이 첫날 밤을 묵는 자리였던 것이 바로 심수관가. 어딘가 옛 정취가 느껴진다.

대숲에 둘러싸인 수관도원. 와룡매 향기가 풍겨오는 흰 건물, 벽체를 따라 사람 키만한 항아리들이 늘어서 있는 곳에 ‘수장고’라는 동판이 걸려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이 전시실에 바치는 주인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짐작하게 하는 엄숙함이 정갈한 실내에 감돈다. 바로 4백년에 걸친 심수관가 선조들의 작품이 시대순으로 진열되어 있다. 바로 이 작품들이 이제 고향의 우리들을 만나러 서울로 가는 것이다.

초대 심당길의 작품, 그토록 귀할 수 없는 다완(차그릇) ‘히바카리’를 여기서 만난다. 우리 말로 ‘불(火)만’이라는 뜻이다. 불만 일본 것을 사용했을 뿐 흙도 유약도 그것을 구워낸 도공도 모두 조선인이라는 이 다완에 담긴 뜻을 이해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무엇을 더 말하랴. 그것은 조선의 것이었고, 조선인의 마음이었다. 내 눈길이 다완을 에워싸며 정겹게 엉켜들었다. 그러셨군요. 여기에 와서도 이토록 조선의 산하가 담긴 조선의 마음들을 구워내셨군요.

불밖에 다른 것은 다 조선 것이라는 ‘히바카리’라는 이름은 바로 조선인의 자존심이었던 것이다. 불이나 겨우 일본 것이지 어디 감히! 하는 심정, 이국에서 조선 다완을 만들며 느꼈을 비통함이 거기에 응집되어 있는 것이다. ‘불만 일본’것을 썼소!라고, 그렇게라도 이름을 붙여야 했을 도공들의,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은 또 어떠했으랴.

오직 하나가 남아 있는 초대 심당길의 작품, 다완 ‘히바카리’는 아무 문양도 없다. 허리선은 경사가 없이 안정되어 있으면서 무겁지 않다. 단아한 모습에서 힘을 느끼게 한다. 품격이리라. 타국 땅에 끌려온 가슴으로 어떻게 이다지도 정갈하게 가라앉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을까 싶다.

현해탄을 건너오며 맞아야 했을 풍랑도, 낯선 땅에서의 쓰라린 나날도… 거기에는 없다. 심수관가의 수장고 맨 앞에서 이 작품을 보았다. 무겁게 느껴지던 도록의 사진과는 달리 가볍고 단아했다. 묵묵히 자신의 현실을 바라보며 많은 것을 안으로 삭여내린 자의 기다림 혹은 그리움 같은, 초대 조선도공들의 마음이 다가오는 것 같아서 나는 입술을 깨물며 그 다완 앞에 서 있었다.

그랬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이 이국에서의 신고 가득한 나날을 이겨낼 수 있었으랴.

밖으로 나오니 조용하던 전시장에는 사람들이 붐비고 있다. 제복을 입은 직원들이 손님들에게 작품을 설명도 하면서 팔고 있다. 굵은 모래를 깐 정원에 햇빛이 눈부시다.

한수산(작가·세종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