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기업 판정결과가 발표되던 18일 정오.
재계 24위 해태그룹의 박건배(朴健培·50)회장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도 설마…’ 했던 주력계열 3사가 모두 퇴출 판정을 받아 그룹의 공중분해를 피할 수 없게 됐다.
77년 부친 박병규(朴炳圭)회장의 타계후 29세의 젊은 나이로 사업을 물려받아 옆도 안보고 달려온 21년 기업가의 꿈이 물거품이 된 순간이었다.
초우량기업으로 손꼽히던 해태제과를 모체로 1,2년에 하나씩 사업을 확장해 15개 계열사를 거느린 박회장은 ‘제2의 창업주’란 칭송을 들을 만큼 탁월한 사업능력을 인정받았다.
박회장은 부도이후 “78년 상사부문에 손을 댄 것이 결정적인 패착”이라고 측근들에게 자주 말해왔다. 상사를 경영하다보니 이것 저것 돈이 될 만한 사업이 눈에 들어왔고 전자 중공업 건설에까지 손을 뻗쳐 급속한 ‘탈(脫)제과’를 추진했다.
그러다 전자사업에 대한 과도한 투자와 중공업부문의 적자 누적으로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결국 그룹 몰락의 결정적 패착이 되고 말았다. 그는 요즘 “한우물만 팠어야 했다”고 땅을 치며 후회한다.
퇴출기업 발표로 적지 않은 부실재벌이 간판을 내리게 되면서 재벌총수들이 때늦은 후회를 하고 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저마다 한국 최고의 재벌 꿈에 젖어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신기루’였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는 이야기다.
지난달 15일 동아그룹에서 완전 퇴진한 최원석(崔元碩·55)전회장.
요즘 대전에 있는 부친(최준문·崔竣文회장·85년 작고)의 묘소를 자주 찾아 회한의 시간을 보낸다.
34세때인 77년 회장직을 맡아 수성(守城)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던 최회장이 몰락 징후를 보인 것은 95년 동아건설이 시공한 성수대교가 무너지면서부터.
이듬해 3월 부인 배인순(裵仁順)씨와의 이혼소송에 이어 7월에는 어머니 임춘자(林春子)씨와의 재산권분쟁에 휘말리고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 비자금사건으로 2년6개월의 실형선고까지 받는 등 비운이 연속됐다.
이쯤되자 최회장은 일에서 마음이 떠나고 전문경영인들이 경영을 전담하게 된다. ‘사람을 의심하거든 쓰지를 말라. 사람을 썼거든 의심하지 말라’는 최회장의 용인술(用人術)대로 동아에는 정례화된 최고 의사결정기구도 없고 결제서류상 회장의 결재란도 없다. 언뜻 보기에 완벽한 자율경영처럼 여겨졌던 경영체계가 그룹부실의 가장 큰 주범이 됐다.
최회장은 동아그룹이 위기에 처하자 급기야는 김포매립지 용도변경과 자신의 퇴임을 맞바꾸는 카드까지 내밀지만 이미 기울어진 그룹을 정상화하기에는 역부족.
그는 퇴임시 “재산을 남에게 넘겨준 것보다 동아를 망하게 하고 떠나는 것이 더욱 괴롭다. 임직원들과 선친께 면목이 없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한일그룹 모기업인 한일합섬의 창립34주년 기념일이었던 22일. 기념식에 불참한 김중원(金重源·50)회장은 온종일 일을 손에 잡지 못했다.
국제상사를 제외한 나머지 4개계열사가 부실판정을 받자 그룹내에서는 “국제가 모기업을 잡아먹었다”는 자조섞인 말까지 나왔다. 85년 국제그룹 인수때만 해도 한일그룹은 재계순위 10위로 모두가 인정하는 ‘승승장구 그룹’이었다. 그러나 국제 인수후 신발산업이 무너지면서 그룹전체의 재무상태가 악화, 사세가 급속히 기울기 시작한다.
섬유중심 사업에서 벗어나 재도약의 계기를 찾던 김회장은 96년 우성그룹의 부도소식이 전해지자 다시 한번 이를 전격 인수한다. 당시 재계27위로 떨어졌던 그룹 규모를 2000년까지 10조원매출, 재계10위권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야심은 계속되는 투자실패로 좌절하면서 결국 몰락을 재촉하는 치욕의 지름길이 되고 말았다. 이에앞서 비운의 종말을 맞았던 극동이나 삼미도 그 과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총수가 ‘황제’처럼 군림하는 한국적 오너십이라는 독특한 경영방식속에서 오랫동안 ‘인(人)의 장막’에 둘러싸여 그룹의 실상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재벌총수들. 독단적인 경영방식을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않는 한 재벌의 미래는 결코 없다는 것을 느끼는 총수가 과연 얼마나 될 것인지.
〈이영이기자〉yes20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