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로 된 마룻바닥과 끝이 안보이는 긴 복도, 삐걱이는 창문들, 뒷산으로 이어져 스산한 느낌을 주는 구름다리…. 영화 ‘여고괴담’에서 분위기를 살려주는 일등공신은 촬영 장소로 쓰인 서울의 한 여고다.
‘여고괴담에서 가장 돋보이는 주인공은 학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 학교는 마치 영화를 위해 지은 세트마냥 영화와 딱 맞아떨어졌다.
스타 시스템에 대한 의존을 벗어나 한국영화의 소재와 표현방식이 다양해져서일까. 영화의 주제와 들어맞는 촬영 장소, 배경의 중요성이 두드러지는게 요즘 추세다.
‘여고괴담’의 박기형감독이 요구한 촬영 장소의 조건은 바닥이 나무이고 복도가 길어야 한다는 것. 서울시내의 오래된 학교 리스트를 뽑아 섭외에 들어간 제작진은 수차례 문전박대를 당한 끝에 신축공사를 앞둔 이 학교에서 촬영허가를 받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여고괴담’이라는,무시무시한 영화 제목을 밝히지 못한 채 ‘아카시아’라고 둘러대고 촬영을 서둘러야 했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왜 그런 영화를 우리 학교에서 찍느냐”며 제작진에게 항의했으나 영화를 본 뒤 반응이 좋아 오해가 풀렸다는 후문.
영화에 나오는 뒷산의 창고는 춘천의 한 고등학교에 있는 미술실이다.
가을에 개봉할 이광모감독의 데뷔작 ‘아름다운 시절’도 그림같은 배경이 돋보이는 영화다. 이 영화는 국내보다 앞선 5월 칸 영화제에서 선보여 빼어난 영상미로 찬사를 받았다.
장소 헌팅에만 1년이 걸린 이 영화에는 강원도와 제주도만 빼고 전국이 촬영지로 등장한다. 50년대의 분위기를 위해 전신주가 없는 마을을 찾아 전국을 헤맸고 급기야는 완벽주의자로 소문난 이감독이 “연변에 가야겠다”고 하는 바람에 주변사람들이 혼쭐이 났다는 후문. 전북 임실에서 찾아낸 방앗간에서는 한국전력의 도움을 받아 주변의 전신주 10여개를 모두 뽑아내고 촬영에 들어갔다.
건물이 중요한 배경이나 감독의 마음에 드는 장소를 끝내 찾아내지 못할 경우 오픈세트(안과 밖이 다 갖춰진 가건물)를 지어 촬영을 할 수 밖에 없다.
오픈세트로 가장 큰 규모는 태흥영화사가 90년 경기도 벽제 3천평의 부지에 지은 것. ‘장군의 아들’시리즈와 ‘태백산맥’ ‘금홍아 금홍아’ ‘창’과 MBC드라마 ‘육남매’를 이곳에서 찍었다. 그러나 이 오픈세트에서의 영화제작도 다음달 개봉할 ‘세븐틴’이 마지막이 될 것 같다. 땅이 아파트 부지로 팔렸기 때문이다.
〈김희경기자〉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