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의 다각화 경영은 기업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재벌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95년 한 보고서에서 재벌의 문어발 확장을 이렇게 옹호했다.
그러나 3년 뒤인 98년. 재벌들은 ‘생존을 위해’ 오히려 문어발을 자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재계 랭킹 10위인 효성그룹은 20개에 이르던 계열사를 두차례에 걸쳐 단 한개로 줄였다.
한진그룹도 23개의 계열사 중 핵심사업과 무관한 16,17개 계열사를 내년말까지 단계적으로 정리한다는 계획을 얼마 전 발표했다.
이같은 변화는 무엇을 뜻하는가. 바로 재벌 기업들의 경영 패러다임이 다각화에서 핵심역량에 대한 집중화로 급선회했음을 의미한다.
▼멸종된 공룡의 운명을 피하려면〓한국의 재벌들은 그동안 ‘공룡’이 되고 싶어했다. 자신의 ‘전공’과 무관한 업종이라도 일단 말뚝을 박고 보자는 확장욕이 대다수 재벌의 경영전략이었다. 그러나 방만해진 덩치 때문에 재벌들은 지금 각종 질환을 앓고 있다. 멸종한 ‘공룡’의 운명을 밟지 않기 위해 재벌들은 이제 주렁주렁 달려 있던 문어발들을 싹둑 잘라내고 있다.
문어발을 자르라는 요구는 기업 안팎에서 거세다. 18일 발표된 퇴출기업 발표는 ‘밖’으로부터의 압력이랄 수 있다. 그 명단에는 현대 삼성 등 5대 재벌 계열사도 20개 포함돼 있었다.
가차없는 국제경쟁 환경에 내몰린 재벌 스스로도 경쟁력 없는 기업들을 정리할 수밖에 없다.
▼빅딜대상 된 문어발들〓과거 ‘남의 떡이 커보여’ 진출했던 분야에서 재벌들은 호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최근 빅딜 대상으로 오르내리는 삼성자동차 현대석유화학 LG반도체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먼저 석유화학 분야의 경우. 80년대 후반 유화업종의 신규 참여를 제한해온 석유화학육성법이 폐기되면서 재벌들은 경쟁적으로 이 분야에 뛰어들었다. 특히 현대 삼성의 경우는 삼성이 대산지역에 은밀히 부지를 매입, 대단위 석유화학단지 공사에 착수하자 자존심이 상한 현대가 뒤늦게 땅을 매입, 뛰어들었다.
초기에 큰 돈이 들어가긴 해도 한번 공장을 지어놓으면 안정적으로 돈벌이가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유화는 지금 대표적인 중복투자 업종으로 전락했다.
삼성의 자동차도 자동차업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기를 쓰고 진출했지만 불과 4년만에 삼성그룹의 애물단지가 되고 말았다. 2조6천억원의 부채를 떠안고도 앞으로 몇조를 더 쏟아부어야 될지 막막한 상황.
LG 반도체도 10년간 10조원 가까운 돈을 투자했지만 앞날이 불투명하다.
자동차와 주류 과자 전문업체인 기아 진로 해태가 쇠락의 길을 걷게 된 것도 자신의 특기와 무관한 문어발 계열사들의 부실이 결정적 요인이 됐다.
▼전문기업들의 승승장구〓딴눈 팔지 않고 자기 전공을 지켜온 전문기업들은 IMF체제 하에서도 느긋하다. 이들의 ‘한우물 철학’은 우리 대기업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식품 전문기업인 농심은 7개 계열사가 모두 식품 관련 업체. 라면과 스낵에서 모두 선두를 지키고 있는 이 회사는 올해도 수백억원의 흑자를 예상하고 있다. 농심은 올해 장사가 너무 잘돼 보너스를 얼마나 올려줘야 될지를 놓고 행복한 고민에 젖어 있다.
신춘호(辛春浩)회장은 그동안 “농심 정도의 기업이면 다른 사업쪽으로 눈을 돌릴 만하지 않느냐”는 권유를 여러번 받았지만 그때마다 일축했다고 한다.
동국제강그룹은 54년 창업 이후 철강만 고집해왔다. 17개 계열사는 모두 철강과 관련된 업체들. 동국제강 장상태(張相泰)회장은 항상 “철강업종에서 1등을 못하고서는 다른 업종으로 진출할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부채비율이 30대 그룹 중 최상위권을 유지하는 등 튼튼한 회사로 소문나 있다. 덕분에 이 회사 직원들은 요즘의 살벌한 감원태풍 속에서도 전혀 해고 걱정을 하지 않는다.
〈이명재기자〉mj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