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 4월22일 오후 3시가 막 넘은 시각,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에 모 방송사가 군 인사비리를 터뜨릴 것이라는 첩보가 날아들었다.
검찰 수뇌부는 즉각 진상파악을 지시했다. 첩보는 사실이었다. 서울방송이 해군 예비역대령 서모씨의 부인 조모씨와의 인터뷰를 통해 조씨가 89년 당시 김종호(金鍾浩)해군참모총장의 부인 신영자(申英子)씨를 통해 김총장에게 6천만원을 건넨 사실을 취재해 놓았던 것.
검찰은 방송사에 연락, 보도내용과 취재자료를 입수했다. 검찰 수뇌부와 수사실무진이 회의를 열었다. 모두 곤혹스런 표정이었다.
오후 5시15분. 검찰은 김전총장에 대한 수사착수를 공식 발표했다. 언론보도에 대한 정보를 언론에서 입수한 상태에서 언론보도가 있기 전에 수사착수를 발표한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검찰은 그러나 ‘특종’을 하지 못했다. 다른 방송사가 검찰이 서울방송을 통해 취재자료를 입수했다는 소문을 듣고 15분 후인 오후 5시30분 뉴스에 단신으로 군 인사비리를 보도한 것.
검찰의 수사착수 발표는 이보다 15분 앞섰지만 송고(送稿)와 뉴스제작 때문에 실제 보도는 오후 5시30분 이후로 밀렸다.
검찰이 이처럼 언론사 정보를 가로채서 수사착수를 발표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수사 관계자의 설명.
“문민정부 출범 초기의 상황은 검찰로서는 위기 그 자체였습니다. 청와대에서는 거의 날마다 사정과 관련된 지시나 요구가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검찰의 사정활동은 지지부진했어요. 거물은커녕 ‘피라미’도 제대로 못건지는 어려운 상황이 한달 이상 계속됐지요. 이처럼 다급한 상황에서 군 인사비리 문제가 터지게 되자 검찰로서는 앞뒤를 잴 여유가 없었던 겁니다. 그냥 달려들 수밖에 없었죠.”
청와대의 분위기도 비슷했다. 당시 청와대 사정 비서실 관계자의 증언.
“당시 청와대 기자실에서 서울방송이 군 인사비리를 보도한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진상을 알아봤습니다. 내용이 아주 구체적이어서 수사를 안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영삼(金泳三)대통령도 사정에 관한 한 앞뒤 가릴 입장이 아니었고 그래서 곧바로 수사에 들어가도록 한 겁니다.”
군 장성급에 대한 사상 최초의 검찰수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날 밤10시가 넘은 시각 서울 대방동 김철우(金鐵宇)해군참모총장 공관.
김만청(金萬淸)차장과 안병태(安炳泰)작전참모부장 임태섭(林台燮)인사참모부장 도홍기(都洪基)헌병감 등 해군 수뇌부가 속속 몰려들었다. 김전총장에 대한 방송보도와 검찰 수사방침 때문이었다.
공관에 모인 수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인 채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한 참모가 말문을 열었다.
“그냥 쉽게 끝날 사안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제2,제3의 보도가 이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해군과 총장님의 명예를 위해서 총장님께서 용단을….”
“무슨 소리요. 총장님이 잘못하셨다는 말입니까.”
다른 참모가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지휘부가 사퇴를 불사한다는 각오로 사태수습에 임해야 할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태수습이….”
이후 김총장 사퇴설이 삽시간에 퍼져나갔으나 김총장은 사퇴하지 않았다. 검찰은 곧바로 예비역 대령 서씨를 수배했다. 서씨는 경남 마산의 형 집에서 침술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는 그해 1월 고혈압으로 쓰러졌다. 부인 조씨는 남편이 장군 진급에서 세번이나 탈락해 쓰러졌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조씨에게 출두를 요청했다. 조씨는 “수년 전부터 숱하게 진정했는데 본체도 하지 않더니 이제와서 수사하겠다는 이유가 뭐요. 고혈압으로 쓰러진 남편 치료비 때문에 돈을 다 써 서울에 갈 차비도 없어요”라며 흥분했다.
검찰이 “예전의 검찰이 아니다. 문민정부가 확실하게 진상을 밝히겠다”고 설득했지만 조씨의 분은 풀리지 않았다.
검찰은 다음날인 4월23일 새벽 주임검사인 박주선(朴柱宣·현 청와대 법무비서관)중수3과장을 마산 현지로 보냈다. 박과장은 조씨를 설득, 창원지검으로 소환해 참고인 진술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시 수사 관계자의 회고.
“조씨는 말문을 열기 시작하더니 그동안 남편의 진급자금을 마련하느라 고생했던 일들을 털어놓으며 엉엉 울었습니다. 남편이 초급장교 시절부터 진급 때마다 ‘상납금’이 필요해 돈을 마련하느라 말못할 지경에 처했다는 말도 했습니다.”
검찰은 이날 오후 신씨를 전격 소환했다.
신씨는 “인사권이 없는 부인들끼리 만난 것이 죄가 되느냐”며 항의까지 하면서 돈받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틀째 밤샘수사를 받으면서 신씨는 장성 5,6명의 부인에게서 3억원이 넘는 돈을 받은 사실을 자백했다.
신씨에 대한 조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파란이 일었다.
정용후(鄭用厚)전공군참모총장이 “89년 총장취임후 첫인사에서 청와대와 정치권의 고위층이 인사청탁을 했으며 차세대 전투기사업 기종선정을 둘러싸고 미국 회사의 로비가 있었다”고 폭탄선언을 한 것.
정전총장은 자신이 거액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강제전역당했다는 내용이 군 수사당국에서 흘러나오자 이를 반박하며 폭탄선언을 했다.
정전총장의 발언 직후인 25일 오후 국방부에서는 긴급지휘관회의가 열렸다. 권영해(權寧海)국방장관 주재로 김동진(金東鎭)육군 김철우해군 이양호(李養鎬)공군참모총장 등 전군의 고위간부 30여명이 참석했다. 회의가 끝난 뒤 국방부는 군관련 비리에 대해 군이 독자적으로 수사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민간인 신분인 정전총장에 대한 수사도 국방부에서 맡기로 했다.
수사의 주도권은 군으로 넘어갔다. 검찰은 군관련 비리의 ‘본질’이라고 할 수도 있는 차세대 전투기 도입을 둘러싼 비리의혹에 대해서는 손을 댈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검찰이 할 일은 김전총장 등의 인사비리를 계속 파헤치는 것 뿐이었다.
김전총장은 26일 출두했다. 김전총장에게 진급을 앞두고 1억원을 준 조기엽(趙基燁)전해병대사령관도 출두했다.
이들은 “군의 ‘마지막 명예’를 지켜달라”는 검찰의 설득에 쉽게 굴복했다. 김전총장이 장성 2명을 포함한 6명에게서 진급청탁과 함께 3억6천만원을 받은 사실과 조전사령관이 해군제독에게서 6천만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이틀 후인 28일 정전총장에 대한 수사자료가 국방부 검찰부에서 검찰로 넘어갔다. 정전총장은 5월1일 구속됐다. 혐의는 진급 사례비로 1억9천5백만원을 받았다는 것.
수사는 사실상 끝이었다. 군 검찰은 김전총장과 정전총장에게 진급과 관련해 뇌물을 준 장성 및 영관급 장교 13명을 구속하면서 사실상 수사를 끝냈다.
당시 검찰 수사관계자의 지적.
“군이 스스로 나서서 본격적으로 수사하겠다고 한 그 시점이 사실은 수사가 종을 치는 시점이었습니다. 군 내부의 문제를 군 스스로 파헤친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는데다 군 검찰의 수사역량도 일반 검찰에 비하면 미미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성역없이 수사하겠다’며 수사 주도권을 가져간 순간 군은 다시 성역이 된 겁니다.”
이 무렵 군 내부에는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흘렀다. 해군과 공군의 장교들이 수사방향이 크게 잘못돼 있다고 반발하기 시작했다.
당시 수사는 신씨가 돈을 받았다고 꼽는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이뤄졌고 따라서 정말 숙정됐어야 할 사람의 말을 기초로 그 사람이 찍은 사람을 사냥하는 식으로 수사가 진행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군 장교들의 불만과 동요는 점차 집단화하기 시작했다. 특히 육군에 대해서는 수사착수조차 하지 않는 것에 대해 해군과 공군쪽의 불만이 컸다. 공군 영관급 장교 50여명은 차세대 전투기종으로 공군이 선택한 F18기 대신 F16기를 선정한 의혹을 규명하라는 요구를 군 수뇌부에 전달하기도 했다.
5월8일 국방부는 구속된 장성과 영관급 장교 13명을 돌연 석방하고 기소유예처분을 내렸다. 이로써 군 인사비리 수사는 모두 끝났다. ‘군은 여전히 성역’이라는 인식만을 남긴 채….
그로부터 5년이 흐른 98년 6월12일 저녁 서울 강남의 한 식당. 검사 10여명이 모여 저녁식사를 함께 하면서 과거 검찰의 위상과 역할을 회고했다.
한 중견검사가 고백했다. 그는 93년 군 인사비리 수사에 참여했던 검사. “검사로서 군 인사비리 수사를 할 때처럼 자신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군에 대한 수사가 아무런 준비없이 성급하게 이뤄졌고, 이 때문에 군에 대해 정말 의미있는 사정을 하지 못했음을 한탄하는 말이었다.
〈이수형기자〉 so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