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쯤 뒤에나 할 말이 있을까요. 지금은 한판 한판 최선을 다해 둘 뿐입니다.”
‘바둑은 무엇인가’를 묻자 이창호(李昌鎬)9단은 예의 덤덤한 표정으로 말한다. 바둑이란 ‘두어야 할 대상일 따름’이라 말하는 현실주의자. 역시‘프로’다.
열한살 프로입단을 전후한 무렵 그의 애칭은 ‘애늙은이’였다. 소년이 날리는 표독한 비수(匕首)는 무표정한 얼굴때문에 더욱 상대를 아프게 했다.
린하이펑(林海峰)9단은 92년 동양증권배 결승에서 당시 중학교 2년생 이창호5단에게 진 뒤 비슷한 심경을 털어놨다.
“대국중 얼굴을 쳐다봤는데 담담한 표정이야. 이상하다, 분명 내가 유리한데 그게 아닌가 싶어 기분이 나빠지면서 바둑이 점점 꼬여 가더구만.”
세상이 알아주는 ‘포커 페이스’로 ‘이중(二重)허리’라 불리는 린하이펑조차 그렇게 당했다.
이9단을 만나면 23살의 청년같지 않다. 성숙함 원숙미란 말로는 부족한 묘한 느낌을 받는다. 왜일까.
할아버지 손을 잡고 기원을 드나들며 바둑과 인연을 맺은 이후 그는 적어도 한 세대, 많으면 두 세대 이상의 어른들 틈에서 컸다. 어리광을 부릴 상대는 아니었다. 바둑이 훌쩍 커버리면서 준비없이 다가온 성인사회, 그리고 입단서열 중심의 딱딱한 프로기사 세계는 어린 바둑천재가 감내하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힘 한번 쓰지 못하고 꺾여간 고단진(高段陣)기사들은 ‘꼬마 바둑천재’에 대한 찬사와 감탄의 말을 접었다. 원체 내성적이었던 소년은 기뻐도 웃지 않는 법을 배웠고 많지 않던 말은 더욱 아껴야 했다. 처세의 기술을 때이르게 익힌 것이다.
그런 영향 때문일까, 병역을 마친 성인이 되었지만 그는 반상(盤上)주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집과 한국기원, 음식점, 대국장소, 탁구장, 테니스 코트, 가끔 친구들과 어울려 가수 신승훈의 노래를 부르곤 하는 노래방 정도.
이9단이 가장 즐기는 ‘육체 스포츠’는 탁구. 입단을 전후해 배웠다. 대국이 일찍 끝났지만 스승 조훈현(曺薰鉉)9단 집에 들어가기가 무엇하면 부친과 부근 탁구장을 찾곤 했다. 현재 한국기원 탁구회 소속으로 한달에 한번 금요일 오후에 기사와 직원이 어울려 3시간 정도 시합을 벌인다. 또 동갑내기인 양건(梁建)4단 이상훈(李相勳)3단 등과 일주일에 한번 정도 한국기원부근 단골 탁구장을 찾는다. 실력은 ‘동네 3급’쯤.
한국기원의 한 직원은 이9단의 탁구 스타일에 대해 “예전에는 수비 일변도였는데 요새는 드라이브나 스매싱 등을 적극 구사하는 공격형으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최근 보이는 바둑 스타일의 변화와 흡사한 것이 흥미롭다.
몇 해 전부터 프로급 테니스 실력자 윤기현(尹奇鉉)9단의 권유로 테니스를 배워 월 1회정도 코트에 나갔지만 요즘은 뜸한 편이다. 활쏘기도 정신집중에 좋다는 권유로 잠시 한 적이 있다. 보고 즐기는 거라면 농구나 축구도 좋아한다. 등산과 조깅은 ‘땀이 너무 나서’ 체질에 안 맞는다고 여긴다. “스스로 체력이 강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아직 대국 중에 체력이 달린다는 느낌을 가져본 적은 없지만 앞으로 체력이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프로기사의 3대 요소로 기재(棋才) 노력 체력이 꼽힌다. 발군의 기재와 새벽을 지키는 노력파인 그가 20대 초반에 체력을 염두에 두고 있는 대목은 ‘장수(長壽)바둑’을 보증하는 듯하다.
청춘이란 인생의 황금기에 선 그가 이성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팬레터를 받기도 하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사귀는 여성은 없다.
주위에서는 이화여대 기우회가 봄 가을에 하는 초청행사에 그가 5∼6년간 줄곧 나가고 있는 것을 두고 ‘포석(布石)이 수상하다’고 하지만 그는 웃는다. “딴 생각은 없어요. 그냥 충암고출신 기사들과 함께 지도대국을 해오다 보니 그런 거지요.”
그러나 탤런트 고소영에 대한 관심은 유의할 만하다. “고소영이 누구냐”고 짐짓 묻자 “거, ‘16강이 보여요’ ‘지금 때가 어느 땐데’ 하는 광고 있잖아요”하며 그가 출연하는 광고 문안을 줄줄 왼다.
몇해 전 한 통신회사측이 모 프로기사를 상대로 고소영과 광고에 출연하는 교섭을 했지만 성사되지 않은 일이 있었다. 옆에 있던 이창호가 끼어 들며 “제가 만나면 안되나요”했단다. 광고출연건이란 얘기를 듣고는 취소했으나 어쨌든 3년 연상의 연예계 스타 고소영에 대한 그의 ‘수읽기’가 꽤 진행된 느낌이다. ‘수상전’까지 벌어질 지는 모르지만.
지난해 병역을 마친 뒤로 할머니 박복주(朴福珠·80)씨가 몇 번 혼인 이야기를 했다지만 두살 위의 형도 미혼이어서 3년 쯤 뒤에나 생각할 일이라고 한다.
대학에 바둑학과가 생기면서 진학을 권유받자 그는 거절했다. 후회는 없다면서도 약간의 ‘뒷 맛’을 남긴다. “앞 일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한다는 게 별 의미는 없잖아요.”
부모가 사는 고향 전주에는 자주 가는 편이지만 가족을 만나는 것일뿐 고향에 대한 특별한 추억은 없다. 초등학교 3학년때 고향을 떠났으니 친구를 사귈 시간도 없었다. 현재 가장 잘 어울리는 친구는 동갑내기인 최명훈(崔明勳)6단. 이9단에 비해 입단은 몇 해 늦었지만 기전 결승에서 만나 겨루기도 했었다. 주위의 평가나 본인 말로도 ‘단짝’임에 충분하다. 낯선 사람과의 만남이 만드는 어색한 분위기를 못견뎌하는 그는 대화 부족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요즘 책을 읽고 있어요. 소설이나 가벼운 역사책이지만 사람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조헌주기자〉hans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