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열린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대학특강’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각 나라의 대통령이 대학에서 ‘연설’하는 일은 간혹 있어도, 그리고 민주주의를 현장에서 실천하려는 의욕이 강한 미국의 대통령들이 고등학교에 가서 학생들과 대화하는 경우는 있어도 대통령이 강의노트 몇 장을 들고 강의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대통령은 웃저고리를 벗고 칠판에 ‘우리 민족을 생각한다’라고 쓴 후 앉아서 강의를 시작했다.
▼ 민족의 저력 확신
전후 미국에 갔던 영국의 처칠 총리가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워싱턴대에서 연설하며 처음으로 ‘철의 장막’이라는 표현을 썼던 것은 유명한 일화이며 미국의 클린턴대통령도 언젠가 조지타운대에서 자신의 업적을 설명하기 위해 그림을 몇장 들고 나온 적이 있지만 이처럼 강의를 한 대통령은 아마 이번이 처음인 듯 싶다.
이미 이스라엘의 시몬 페레스총리, 영국의 대처총리, 그리고 일본의 호소카와총리가 다녀간 바 있는 인촌기념강좌답게 김대통령의 강의는 세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고 기념관에는 대학관계자들과 동문, 그리고 학생이 어울려 청강에 열중했다.
강사인 김대통령은 특유의 논리와 비유법, 그리고 실례를 들어가며 소상히 설명해 청중을 압도했고 어쩌면 교수로서의 자질도 과시하여 이날 받은 명예박사학위에다 명예교수증도 받을 만했다.
이번 특강은 제목대로 민족의 저력과 앞날에 관해 매우 시사적인 내용을 압축해서 짧은 시간에 충분히 전달됐다.
우선 민족의 저력은 문화 교육 저항의식 그리고 한(恨)으로 충전되어 있다고 했다. 특히 문화는 몽골이나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했으면서도 결국 중국에 동화된 예와 달리 우리는 잦은 외침과 지배에도 불구하고 외세를 극복하고 재창조하여 민족의 정체성을 지킬 정도로 탄탄한 겨레임을 강조했다.
그것은 IMF 체제이후 개방의 시련끝에 ‘우리’를 재창조할 수 있다는 강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아울러 김대통령이 강조한 ‘민족’속에는 동서의 지역민과 남북의 겨레를 한데 아우르는 뜻이 강하게 배어 있다.
대통령은 나아가 민족의 앞날이 현재의 모순과 불합리한 요소들을 차제에 극복한다면 ‘태평양의 기적’을 이룰 것이라고 확신했다.
대통령이 몸소 시도한 이 역사적 강의의 메시지와 의미를 다시 정리하면 “정부가 모범을 보일 터이니 나를 따르라. 나와 함께 조국의 재건에 전력하자”이다. 그는 이를 “좋은 국민과 좋은 정부가 손을 맞잡아야 한다”는 말로 되풀이해 강조했다.
이번 대통령의 특강을 놓고 일부에서는 “할 일이 많을텐데…”하며 비판적 내지는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정치라는 것은 대중에게 직접 호소하는데서 출발하고 대중을 이해시키는데서 끝난다. 정보사회가 도래하면서 소비자가 자신의 구미에 맞는 상품을 얻기위해‘역광고(Reverse Advertising)’를 내듯이 정부는 그 역광고 방식에 부응하기 위해 어떤 방법으로라도 국민에게 가까이 가야 하며, 이런 뜻에서 대통령의 역할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무한하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대통령의 강의가 대통령의 임무중 전형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어려운 시기에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충정이 강의내용 구석구석에 역력히 배어 있음을 알고 우리 모두가 용기를 가질 의무를 느낀다.
▼ 실천 중요성 명심해야
그리고 이번 강의가 더 의미있었던 것은 대통령직의 수행과 퇴임후의 역할을 미리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한 나라 지도자의 바람직한 모습을 미리 그려볼 수 있어 좋았다는 뜻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퇴임한 대통령의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없어 안타까웠는데 퇴임후 ‘성공한 대통령’으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역대 대통령과 달리 자유롭게 천하를 주유하며 교육기관 등 여러 모임에서 강연하며 국민과 호흡할 수 있는 그런 대통령의 모습을 미리 본 듯하여 다행스럽다.
물론 대통령의 강의는 여느 교수의 그것과 달라 실천이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새겨야 할 것이다. 이번 강의를 계기로 한국 대통령사의 새 장을 펼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김광웅(서울대교수·정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