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술과 도박으로 세월을 보내더니 얼마전 회사에서도 해고됐습니다. 저나 아이들한테 무관심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이젠 정말 지긋지긋해 헤어지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군요. 좀 도와주세요.”
이렇게 간절히 호소하는 여성들을 이따금 만난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자신의 결혼생활이 잘못됐고 거기서 벗어나와야 한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는 점. 그렇게 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써봤냐고 물어보면 대답 역시 거의 한결같다.
“공연히 큰 소리내고 싶지 않아서 참아왔을 뿐이에요. 아이들 때문이라도…. 나 하나 참고 희생하면 되지 하는 생각뿐이었어요.”
이런 사람은 갈등이 싫어서 참고 사는 것이 얼마나 편리한 자기 합리화인지 모르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게으름. 희생이나 양보 같은 고상한 단어로 포장하고 있지만 변화가 두려워 익숙한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것이다. 갈등은 덮어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더욱 깊숙이 가라앉아 시한폭탄처럼 터질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 뿐. 그것은 한번 폭발하면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아무 문제 없이 잘 사는 것 처럼 보이던 부부가 느닷없이 이혼해 주변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이 있다. 대개 ‘단지 시끄럽게 되는 것이 싫어서’ 서로 덮어두었던 갈등과 문제가 한꺼번에 터져 수습이 안된 경우.
변화에 대한 두려움은 생각보다 크고 뿌리깊다. 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문제와 갈등을 피하려고만 한다면 더 큰 위기가 다가온다. 때론 ‘익숙한 것과의 결별’도 필요하다.
양창순(서울백제병원 신경정신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