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무용(武勇)을 자랑하던 사쓰마 번은 조선 도공들에 의해 특산품 도예의 산지로 변한다. 무(武)에 실용이 덧붙고 용맹(勇猛)에 산업이 섞이는 것이다. 사쓰마에 바친 이 업적이야말로 조선 도공이 이루어낸 또 다른 위대함이다. 그리고 거기에 심수관가 14대가 있다.
번에 의해 검은 도예품만은 일반인의 사용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번요(藩窯)였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이 구워낸 사쓰마 야키의 진수 백도(白陶)작품을 가질 수 없었다.
다만 균열이 있거나 일그러져서 깨버려야 할 것들만이 허락을 받아 남겨질 수 있었다. 후세에 기술을 전수하려는 도공들의 마음 때문이었다. 깨지고 일그러진 것에서 그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배워야 했다. 미술품으로 완성된 작품은 왜 그것이 그렇게 되었는가를 가르치지 못한다. 그렇게 해서 표본으로 길라잡이로 상처많은 실패작들이 심수관가에는 남았다. 성충이 되기 위해 벗어야 하는 허물처럼.
심수관가의 수장고에서 이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작품은 그런 사연 속에서 남겨진 것들이다. 일가의 찬연한 일품이 아니라 먼 훗날을 위한 인내와 기다림의 산물이었을 뿐이다. 만약 그 볼륨에 압도당한다면 그것은 당대를넘어서려는심수관가선조대대로의가슴이가지는웅장함일 것이다.
12대 심수관의 최대 걸작의 하나로 이야기되는 작품이 가고시마 시립미술관에 있다. 관외 대출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말에 그 명작을 만날 수 없는 서운함을 누르며 나는 다른 작품을 보러 미술관으로 갔었다. 사쓰마 야키의 큰 흐름 속에 심수관가는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못만나리라 믿었던 그 작품이 2층 로비에 당당히 전시되어 있지 않은가. 4월부터 다시 전시되고 있다는 직원의 설명이었다. 무엇보다도 높이 1m55㎝, 직경 87㎝, 주둥이둘레 67㎝의 규모가 바라보는 이를 먼저 압도한다. 그리고 그 화려한 채색!
이 작품은 사쓰마의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島津齋彬)가 도쿠가와 13대 쇼군에게 딸을 시집보내면서 보냈던 혼수였다. 그것이 유럽으로 건너간 뒤 행방을 알 수 없이 1백여년을 전전하고 있었다. 오사카의 한 회사는 이 작품이 이탈리아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사들인다. 경제대국 일본이 발휘한 위력이었으나 곧 이 회사가 경영난에 부닥치자 14대 심수관은 거금을 들여 자신의 수장고에 안치한다. 1백여년만에 돌아온 어머니의 품이었다. 그러나 결국 심수관가를 또 떠나 시립미술관으로 가야 했던 이 명품. 그 멀고도 긴 유전(流轉)을 견디어 낸 명품의 4면에는 오늘도 용과 봉황으로 둘러싸인 4계절의 정경이 수놓여진듯 찬란했다.
그날 나는 수관도원의 다카하마에게 이 작품을 만난 감동을 전하면서 말했다.
“나는 그 작품을 보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작품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작품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딘가 귀기(鬼氣)같은 것이 느껴져 무서웠다는 말을 했다. 그때 직원이 놀라며 말하는 것이 아닌가.
“무섭다는 말을 한 사람이 또 있습니다. 바로 그 작품을 찍던 카메라맨이었습니다.”
그렇다. 수관도원의 수장고 속의 작품은 어느 도자기 애호가가 모았던 수집품이 아니다. 화려하지도 찬연하지도 않다. 오히려 상처나고 찌그러지고 금간… 그런 작품들이 많다. 당연히 도공들의 손에 의해 깨어져 버려졌어야 할 작품 아닌 작품들이다. 그러나 이 도자기는 작품을 뛰어넘는 4백년의 증언이며 고난의 흔적들이다. 갈라진 틈새는 눈물이며, 일그러진 표면은 어쩌면 이 타국 땅에 살아남아야 했던 심수관가 선조들의 장렬함인지도 모른다.
나는 여기서 가문의 한분 한분이 벗어놓고 간 생명의 허물, 그 예술혼의 잔향(殘香)과 줄기찬 생명력을 꿰뚫어 보려고 했다. 전란을 만나도 깨지지 않게 지켜온 것은 후대 도공들의 정신력이었고 영혼의 고결성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이 우리를 만나러 서울로 오고 있다.
한수산(작가·세종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