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민족을 위해 대통령 각하와 소장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국정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김현철(金賢哲)씨.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군부만큼 그의 힘이 강하게 투사(投射)된 곳도 드물다.
대통령의 30대 아들이 군 장성들의 ‘충성서약’을 받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과거 군사정권은 물론이고 일부 정치후진국에서도 찾기 어려운 대통령의 아들에 대한 군 일부의 충성서약은 문민 군부의 최대 오점으로 남아 있다.
현철씨 측근의 증언.
“문민 군부에서 잘나갔던 3성 이상 장군들과 주요 보직의 소장급 장군들은 거의 예외없이 현철씨에게 충성맹세문을 바쳤다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충성서약이라고 해서 특별히 정해진 양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A4 용지에 김영삼(金泳三)대통령과 현철씨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내용을 위주로 개인별로 쓰고 싶은대로 썼습니다. 개인약력과 친가 처가 외가 등 가족관계와 상벌사항 등도 충성맹세문에 첨부됐지요.”
일부 ‘신한국군 장성’들의 충성서약은 대부분 현철씨가 파견한 ‘전령’들이 장성들의 집무실이나 공관 등을 방문해 받아냈다. 군에서 가장 높은 계급인 대장이나 3성 장군도 ‘소통령의 특사’를 대하는 예의는 깍듯이 갖추었다는 것이다.
한 육군장성의 설명.
“군에서는 진급을 전쟁에 비유합니다. ‘죄를 짓고 남한산성(옛 육군교도소)에 가있어도 진급철만 되면 가슴이 설렌다’는 말이 있을 정도죠. 하나회 숙정 이후 새로운 군부실세로 떠오른 인물들이 모두 현철씨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있다는 말이 당시 파다했습니다. 군인들 사이에 ‘아직도 소산(小山)을 만나지 못했느냐’는 말이 유행처럼 번질 때였습니다. 그러나 현철씨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온 충성맹세를 했다기보다는 진급경쟁에서 탈락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일종의 ‘보험들기 심리’로 했다고 봐야 합니다.”
충성서약을 한 장성들은 현철씨가 마련한 일정한 의식을 밟았다. 현철씨 측근의 이어지는 증언.
“현철씨의 군장성 관리는 일정한 패턴이 있었습니다. 통상 충성맹세문을 받으면 1차 만남자리가 만들어졌습니다. 서울시청 앞 프라자호텔 3층 일식집에서 상견례를 겸한 조찬이 이뤄졌습니다. 조찬은 전복죽이었지만 다 먹는 장군은 절반도 안됐죠. 대부분의 장성은 1차 만남으로 끝났지만 주요 직위의 장군들은 추가로 접촉했습니다. 2,3차 자리는 서울 을지로 롯데호텔 지하중식당 상해(上海)였습니다. 몇번 만나서 친해지면 술자리로 이어졌습니다. 문민정권의 많은 군수뇌부 장성들이 이같은 절차를 거쳤습니다. 현철씨가 만나는 장성들에게 ‘어른께 오늘 장군님을 뵙는다는 말씀을 미리 드렸더니 잘 대접해드리라고 했습니다. 어른과 저는 장군님만 믿습니다’라는 식으로 말문을 열면 감격하지 않는 장성이 없었지요. 심지어 어떤 장성은 무릎까지 꿇고 현철씨에게 술잔을 올렸습니다.”
문민정부가 출범한 지 두달쯤 지난 뒤인 93년 5월초 서울 인사동 한정식집에서는 현철씨와 D, J, K중장 등 수도권의 군단장급 부대장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현철씨〓장군님들은 군내에서 특히 중요한 일을 맡은 분들입니다. 30년만에 이룩한 문민정부가 잘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장군들〓목숨을 바쳐 각하께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저희들이 문민정부의 개혁정책 추진에 최선을 다할 것이니 영식님도 걱정마십시오.
하나회 숙정작업 초기에 극비로 이뤄졌던 이들의 회동은 참석 장군 중 한 명이 “젊은 사람이 예의도 바르고 국가관도 뚜렷하고 아버지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효자더라”고 자랑하고 다니면서 군내에 은밀히 퍼졌다.
그로부터 보름 뒤 같은 장소에서 현철씨와 P, K중장 등 현역 군단장 2명을 포함한 5,6명의 술자리가 베풀어졌다. 만취한 현철씨는 이 자리에서 “군인들 보안의식이 그것밖에 안됩니까”라며 크게 역정을 냈다. 현철씨와의 만남을 누설한 그 장군은 결국 다음 진급인사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94년 1월 중순 롯데호텔 상해. 현철씨는 사복차림의 모 군사령관과 상견례를 가졌다. 군개혁이 화제가 됐던 이날 자리는 두시간 가량 이어졌으며 이후 그는 문민군부 최고의 실세가 됐다.
그렇다면 현철씨의 군부내 영향력은 어떻게 형성됐을까. 당시 육군의 한 인사담당자는 “현철씨를 빼고는 문민정권의 군인사를 논할 수 없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현철씨가 군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은 그가 군인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 알려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장성인사가 끝나면 ‘누구 누구는 현철씨 덕분에 진급했다’는 식의 뒷얘기가 흘러나오는데 누가 그에게 다가서려 하지 않겠습니까. 소문이 번지면서 영향력은 계속 확대 재생산됐던 겁니다. 현철씨는 해병대 방위병 출신으로 문민정부 출범 직전까지는 군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처음에는 장성들에 대해 경외심까지 갖고 있었지요. 그러나 문민정부 출범 후 장성들이 경쟁이라도 하다시피 그의 곁에 다가서려 하자 점차 군을 쉽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철씨가 군인사에 개입하게 된 것은 김전대통령의 잘못이 큽니다. 문민정부 초기 하나회를 숙정하면서 기무사의 대통령 독대를 폐지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군을 잘 모르는 만큼 군사정권 때보다 더욱 세밀하게 군정보를 파악하려고 노력해야 했는데 스스로 그 길을 막았습니다. 그리고는 현철씨에게 군을 맡기다시피 해버린거죠.”
현철씨는 장성인사뿐만 아니라 국방장관 임명에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문민군부를 이끌었던 이병태(李炳台·육사17기) 이양호(李養鎬·공사8기) 김동진(金東鎭·육사17기)씨가 장관에 기용된 배후에는 현철씨가 있었다는 것이 군내의 정설이다.
94년 12월 인사에서 당시 이양호합참의장과 김동진육참총장간의 국방장관 임용을 둘러싼 반전 드라마는 현철씨의 장관인사 개입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현철씨 인맥으로 분류되는 청와대 K전비서관의 기억.
“94년 12월 이홍구(李洪九)내각 출범 때였습니다. 현철씨가 사전에 나에게 알려준 명단과 실제 발표가 달랐던 사람이 한명 있었습니다. 바로 국방장관이었지요.”
96년 10월 김동진장관은 취임 직후 집무실에서 국방부 출입기자들과 한명씩 돌아가며 개별 간담회를 가질 때였다. 김장관은 ‘현철씨를 만난 적이 있느냐’는 한 기자의 물음에 무심결에 이렇게 대답했다.
“참모총장 시절 동문회 모임에서 현철씨를 처음 만났습니다. 당시 그가 나에게 ‘장관에 취임할 의사가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5·18사건으로 고소돼 있기 때문에 어렵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발언은 언론에 보도돼 97년 3월 국회 국방위와 같은 해 4월 현철씨 청문회 때 곤욕을 치르는 빌미가 됐다.
당시 육군본부에 근무했던 한 장성의 전언.
“김총장은 현철씨에게서 이미 장관 내락을 받은 듯했습니다. 당시 육본 장성들은 김총장에게서 ‘다음 장관은 나’라는 식의 말을 듣고 사전에 영전축하 회식까지 했었습니다.”
K비서관이 이홍구총리에게 알려준 국방장관은 김총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홍구내각의 국방장관은 이양호합참의장으로 바뀌었다.
군 정보소식통의 말.
“현철씨의 김총장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습니다. 고교 선배이기도 했지만 하나회 숙정의 선봉을 맡았기 때문에 신뢰를 아끼지 않았었죠. 그런 만큼 일산신도시 장벽 발언 등으로 물의를 빚은 이병태전장관 후임으로 제일 먼저 생각난 사람이 김총장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철씨는 군 정보기관에서 올린 보고서를 보고 마음을 바꿨습니다. 보고서 요지는 ‘5·18에 연루된 김총장이 국방총수로 가는 것은 역사 바로세우기에도 어긋난다. 이양호합참의장이 청렴한데다 군개혁 이미지와도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참신하고 좋은 생각”이라고 감탄하며 이의장의 장관 기용을 아버지에게 건의했습니다.”
이후 합참의장에 임명됐던 김총장은 96년 10월 이장관이 수뢰사건으로 물러난 뒤 국방총수직에 올랐다. 하나회 출신 C예비역소장은 현철씨의 군인사 개입에 대해 이렇게 비판했다.
“현철씨가 군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은 군인이면 다 아는 사실입니다. 현역에 남아있는 후배들한테서 ‘웬만한 장군치고 현철씨를 만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부나방처럼 그를 찾아다니는데 인사가 제대로 될 것이며 군이 제대로 설 수 있겠습니까.”
〈황유성기자〉ys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