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秘話 문민정부 65]軍개혁/「小統領」의 개입

입력 | 1998-07-13 19:18:00


92년 대선 당시 김영삼(金泳三)후보의 당선을 위한 군인사들의 지원작전인 ‘100계획’을 가동하며 군부와 손을 잡은 김현철(金賢哲)씨는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자연스럽게 대통령의 군부대리인으로 변모했다.

87년 대선 패배 이후 여론조사기관인 중앙조사연구소를 만들어 ‘감(感)의 정치’에 주로 의존했던 상도동 진영에 여론조사 정치를 본격 도입하면서 나름대로 정보관리를 익혀온 현철씨였다.

현철씨는 군부에 대해서도 나름대로의 독특한 정보관리방식을 활용했다. 군 정보소식통의 증언.

“현철씨의 군부관리는 치밀하게 이뤄졌습니다. 군내의 세세한 동향까지 놓치지 않기 위해 군정보를 이중 삼중으로 체크하는 안전판을 마련했습니다. 군수뇌부의 보고를 기무사 정보 등을 활용해 1차 점검한 다음 현철씨의 비선조직을 가동해 국방부와 기무사 등 공조직에서 올린 정보를 재확인하면서 군수뇌부를 견제했습니다. 문민정부 시절 군에서 잘 나간다던 일부 장성들이 갑자기 낙마한 경우는 대부분 현철씨의 조직이 군내의 비판적 여론이나 비리 등을 보고한데 따른 것이었습니다. 현철씨가 군인사를 농단했다는 비판도 많지만 비선조직을 활용해 수뇌부의 전횡이나 비리를 막는 역할도 한 셈이죠.”

문민정부 초기 군개혁의 기수역할을 자임했던 권영해(權寧海)국방부장관은 외부에 알려진 것과 달리 사석에서 자기 변명을 많이 늘어놓았다. 특히 권장관은 김진영(金振永)육참총장과 서완수(徐完秀)기무사령관을 전격 해임한 93년 3월8일 국방부 출입기자들에게 당일 청와대에서 있었던 조찬대화를 모두 털어놓음으로써 현철씨의 불신을 샀다.

당시 현철씨의 비선조직은 “책임회피식 언행으로 대통령각하의 의도를 왜곡 전파해 통치부담을 가중시킨 것은 장관의 자질에 문제가 있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이들의 보고내용.

“권장관은 장성들과의 비공식모임 및 개별면담 때 ‘대단히 미안하다. 나는 절대 그러고 싶지 않은데 윗사람의 뜻이 워낙 확고하여 어쩔 수 없다. 내 입장을 이해해달라…’는 등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대통령각하의 포용을 기대했던 수많은 당사자들을 실망과 수모의 길로 가게 하였고 하나회 제거 의지를 확신한 중하위 실무자들은 무자비한 인사를 자행함으로써 제삼자의 동정심을 유발시켰습니다.”

하나회 숙정작업이 한창이던 93년5월 모 군사령관이 임명된 지 얼마되지 않아 군복을 벗었다. 현철씨 비선조직이 그가 12·12사건에 연루됐다는 사실과 함께 사생활에 대한 군내의 비판적 여론을 현철씨에게 보고한 뒤였다.

93년11월 육군인사부장 I소장이 보직해임된 것도 이들 조직의 보고가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I소장은 전방사단장 시절 병영 현대화 공사를 하면서 지방건설회사와 14억원 규모의 공사계약을 하고 영관급인 공병대대장과 관리참모 등과 함께 1억8천여만원의 뇌물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부하들은 전역조치됐지만 I소장은 개인적으로 받은 4천만원을 부대운영비로 썼으며 자신이 착복한 것이 없다고 주장해 군수뇌부도 덮어두려 했다.

그러나 현철씨 비선조직은 “I소장을 그대로 두면 군개혁 조치에 흠집을 남기게 되며 그가 권장관의 사단장 시절 예하 연대장이어서 권장관의 비호를 받고있다는 비난여론이 군내에 비등하다”는 보고를 올렸다. 결국 I장군은 부하들의 전역조치 2주만에 보직해임됐다.

비선조직은 현철씨의 군부관리에 대한 각종 건의와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문민정부 초기 이들 조직이 현철씨에게 올린 건의문.

“문민정부다운 군의 개혁추진은 구호가 아닌 실질적인 개혁이 되어야 합니다. 우선 상하 동료의 존경과 신뢰를 받는 인사의 등용이 가장 중요합니다. 전직 대통령들은 군생활 및 집권과정을 통해 부하들에게 빚을 졌으므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각하는 군에 대해 빚을 진 것이 없으므로 얼마든지 공평무사한 인사가 가능합니다. 엄정한 인사권 행사가 절대 필요하며 간부들보다 하부의 개혁이 더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특정세력의 편중을 지양하고 자연스러운 견제와 균형을 도모해 선의의 경쟁을 유도해야 합니다. 주요직위 인사시 전체적인 면에서 다각적으로 검토하여 대통령각하의 의지를 적극 반영해야 합니다.”

현철씨의 군부관리와 관련한 또 다른 건의문.

“소장님(현철씨 지칭)은 군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져주셔야 합니다. 군 내부 뿐만 아니라 예비역 주요인사를 지속적으로 만나 친근감을 증진하고 이들에게 올바른 행동방향을 제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외부 노출 등에 대비해 소장님은 철저히 사적인 모임형식을 견지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공적인 요소가 개입하면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합니다. 특히 대상자의 선정과 그 방법은 신중해야 합니다. 범계파적으로 자연스러운 지지기반 형성이 중요합니다.”

93년 말 현철씨의 비선조직은 문민정부의 하나회 숙정에 대해서는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방식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판적인 보고서를 올려 나름대로 군내 여론을 전달하려고 했다.

“이 내용은 어느 특정인은 안된다거나 반대로 어느 누구는 등용되어야 한다는 소아적인 차원이 아니라 오직 국가와 군의 먼 앞날을 내다보면서 절박한 심정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진정한 군개혁입니까. 수뇌부 몇명을 교체했다고 군의 개혁이 이루어진 것입니까. 언제까지나 ‘군개혁〓하나회 척결’을 주창할 것입니까. 꼭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한을 심어주면서 할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습니까. 지금 군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까.”

군부에 대해 현철씨는 이처럼 비선조직과 공조직에서 올라오는 정보를 적절히 활용했다. 그러나 비선조직은 문민정부 초기 상당히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나 현철씨가 점차 공조직쪽으로 기울어짐으로써 활동이 위축되고 나중에는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현철씨 측근의 증언.

“거의 매주 토요일 비선조직과 현철씨와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조직원들은 이때 일주일 동안의 활동결과와 군내 여론동향을 보고하곤 했습니다. 인사를 앞두고는 인사 대상자까지 추천했지요. 그러면 현철씨가 이들의 의견을 종합해 일요일 예배 때 아버지에게 군부동향을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건의가 늘 받아들여졌던 것은 아닙니다. 현철씨가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일은 일절 하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군에 관해 보고할 때 아버지가 묵묵부답이거나 ‘응 알았어’ 정도의 반응을 보이면 더이상 자기주장을 펴지 않았습니다. 공조직쪽에서 대통령에게 사전입력을 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하나회 숙정작업 이후의 군인사에 대해 군관계자들은 다분히 비판적이었다. 권전장관의 ‘청성인맥’(청성부대로 불리는 6사단장 출신인 권전장관의 인맥)과 K전장관의 1·5(1사단 5군단)인맥 및 현철씨 출신고교 인맥 등이 군권을 장악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현철씨의 비선조직은 이들 인맥에 대해 끊임없이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보고서를 띄웠다.

“특정세력 위주의 무리한 인사로 문민정부에 대한 실망감이 팽배합니다. 특히 육군의 차기 인사참모부장은 누구, 수방사령관은 누구, 참모차장은 누구라는 식으로 특정직위에 특정인이 정해진 것처럼 여론을 조성한 뒤 인사 때 이를 기정사실화해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또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자신들에게 반대하거나 하나회에 우호적인 언동을 하는 사람은 철저하게 제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복지시설이 주어지고 아무리 많은 노력을 하더라도 매일같이 근무하는 상관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고 스스로 책임질줄 모르면서 부하들의 때묻은 돈이나 챙기고 전투력 향상보다는 진급에 더 관심을 쏟는 사람이라면 군의 발전은 요원합니다.”

현철씨 측근의 계속되는 증언.

“현철씨는 공식보고선인 군수뇌부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비선조직은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고서를 올렸지만 이들과 대항할 수 없었습니다. 대부분 군내에서 은밀하게 나도는 소문들을 수집해 보고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공조직에서 바로 반박자료를 제시하면 불리한 입장에 처할 수밖에 없었죠. 물론 반박자료라는 것들이 대부분 조작된 것이었지만요. 현철씨가 나중에 자신의 비선조직에 힘을 실어주지 않았던 것은 이들의 보고내용에 오류가 있는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문민정부의 군부개혁은 화려하게 출발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아들이 개입해야 했던 한계 때문에 결국 숱한 새로운 과제를 남긴 채 끝나고 말았다.

〈황유성기자〉ys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