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자금에 대한 검찰의 잣대는 ‘고무줄’이었다.
정치상황과 대상에 따라 들쭉날쭉했다.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나 힘있는 정치인에 대해서는 보고도 못본 척했다.
93년 말 라이프주택 비자금사건에서 여러명의 거물 정치인 명단이 등장했지만 검찰은 그대로 덮었다. 한양그룹 배종렬(裵鍾烈)전회장의 입에서도 최고 권력자 등에게 돈을 줬다는 진술이 나왔지만 역시 묻어버렸다.
언론보도와 시민의 폭로로 실체가 드러난 경우에도 이른바 ‘떡값’과 ‘보험금’의 논리가 등장했다. 검찰은 수억∼수십억원의 돈을 받은 경우에도 “구체적인 청탁이나 대가성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정(司正)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 비자금사건은 이같은 정치자금에 대한 관념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재벌들에게서 수천억원의 돈을 받은 두 전직 대통령은 선거 때나 명절 연말에 순수한 정치자금으로 받았을 뿐이라고 주장했고 재벌들도 순수한 정치자금으로 주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검찰은 그들이 받은 돈을 전부 뇌물로 판단해 재판에 넘겼다. 검찰은 재벌들이 대통령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한 취지가 포괄적으로 기업의 이익을 챙기고 불이익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했고 이는 대법원에서 그대로 인정됐다.
지난해 한보사건 수사에서도 정치자금에 대한 단죄가 이뤄졌다. 검찰은 홍인길(洪仁吉) 정재철(鄭在哲)전의원 등의 ‘순수한 정치자금’ 주장을 무시하고 구속했다. 또 이른바 ‘한보그룹 정태수(鄭泰守)리스트’에 오른 정치인 32명중 8명에 대해서도 법의 심판을 받도록 했다. 이에 대해서도 법원은 “국회의원은 국정 전반에 대한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 소관 상임위 활동과 관련이 없더라도 직무관련성이 인정된다”며 ‘포괄적 뇌물죄’를 재확인했다.
김현철(金賢哲)씨 사건에서는 ‘조세포탈’의 법리가 새롭게 등장했다. 검찰은 현철씨가 수십억원을 활동비 명목으로 받은 뒤 돈세탁을 한 것에 착안해 ‘사기 기타 부정한 행위’로 탈세를 했다며 조세포탈죄를 적용했다.
일선 검사들은 이처럼 새롭게 확립돼온 전통에 따라 청구그룹 장수홍(張壽弘)회장의 진술에 등장한 정치인들에 대한 수사와 처벌도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서울지검 중견검사는 “수억, 수십억원의 정치자금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 검사는 “정태수리스트도 정총회장의 구체적인 진술에서 실마리가 풀렸다”며 “진술은 나왔는데 물증이 확보되지 않아 수사할 수 없다는 논리도 설득력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수형기자〉so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