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 11월23일 미국 워싱턴의 백악관.
빌 클린턴미국대통령이 회담장으로 들어서는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을 반갑게 맞았다. 김대통령은 그러나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간단히 악수만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김대통령은 회담이 시작되자마자 자신의 대북관과 미국에 대한 불만을 설명했다.
“핵문제는 궁극적으로 남북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합니다. 특히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과 남북 상호사찰이 병행돼야 북한의 핵개발 실상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미국은 북한의 속성을 잘 모른 채 너무 믿는 것 같습니다. 북한과 수많은 대화를 해본 우리는 북한을 잘 압니다. 따라서 팀스피리트훈련 중단여부는 한국이 결정권을 행사해야 합니다.”
당초 단독정상회담은 실무진이 사전에 합의한 대북정책에 관한 합의문을 추인하고 간단히 끝내기로 돼있었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시나리오와는 달리 미국의 대북협상 태도 전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
클린턴대통령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는 “팀스피리트훈련을 중단하게 되면 한미 양국이 동시에 발표하자”고 수정제의했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팀스피리트훈련에 대한 최종결정권은 한국이 갖는다는 선까지 양보를 얻어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괄타결’이란 용어가 문제가 됐다. 김대통령이 일괄타결이란 말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한국이 북한에 끌려 다닌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었다.
양국 실무진은 북한의 ‘일괄타결(Package Deal)’ 요구에 대응하는 용어로 ‘포괄적 해결(Comprehensive Solution)’을 사용하기로 사전에 합의했었다. 김대통령과 클린턴대통령에게도 합의서 초안이 보고된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포괄적 해결이란 말도 일괄타결과 같은 이미지를 준다며 이를 바꾸자고 고집한 것. 배석했던 정종욱(鄭鍾旭)청와대외교안보수석과 앤서니 레이크 백악관안보보좌관은 즉석협의를 거쳐 ‘철저하고 광범위한 접근(Thorough And Broad Approach)’이란 대체용어를 찾아냈다.
김대통령이 정치담판하듯 회담을 이끄는 바람에 이날 단독정상회담은 예정시간을 3배 이상 넘긴 1시간20분만에야 끝났다. 클린턴대통령은 김대통령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지만 회담이 끝난 뒤 참모진을 심하게 질책했다.
정상간의 우의를 다지고 양국간 공조를 강화하기 위해 열린 정상회담이 오히려 갈등의 골을 만든 것이다.
정부 관계자들은 이 정상회담이 바로 핵문제에 관한 김대통령의 인식과 정부내 강온대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술회한다.
한 고위관리의 설명.
“김대통령이 상호사찰과 남북대화를 강조한 것은 정부내 강경파의 입김 때문이었고 일괄타결 용어시비는 김대중(金大中)씨를 의식한 것이었습니다. 정상회담 직전에 열린 최종 전략회의에 멤버가 아닌 유종하(柳宗夏)유엔주재대사가 참석, 남북 상호사찰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미국의 대북 유화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김대통령이 이 말에 귀가 번쩍 뜨인 겁니다. 김대통령이 참모들과 협의도 하지 않은 채 정상회담에서 상호사찰을 강조하게 된 것입니다.
정계를 은퇴한 뒤 영국에 머무르다 귀국한 김대중씨는 핵문제를 일괄타결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이후 정부내에서는 일괄타결이란 용어는 금기시됐습니다. 김대통령이 극도의 거부감을 나타냈기 때문이지요.”
김대통령이 왜 정상회담 관행을 무시한 채 클린턴대통령을 몰아붙였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한 핵문제 전개과정을 되짚어봐야 한다.
북한은 93년 3월12일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겠다고 전격 선언했다. 출범 2주일밖에 안된 김영삼정부에는 날벼락 같은 사건이었다.
북한의 핵개발에 관한 정보를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정부로서는 미국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외교채널을 통해 미국과 협의를 계속했지만 출범 두달밖에 안돼 외교진용이 제대로 짜여지지 않았던 클린턴행정부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한승주(韓昇洲)외무장관이 3월23일 미국과 유엔을 급거 방문하면서 초기 대응전략이 정리됐다. 한전장관의 설명.
“정부는 10여일간 회의를 거듭한 끝에 북한의 NPT 탈퇴선언을 철회시키기 위해 대화와 압력을 병행한다는 기본전략을 마련했습니다. 워런 크리스토퍼국무장관 레이크보좌관 등과 만나 전략을 설명하자 미국도 쉽게 동의했습니다. 유엔에서의 대북결의안 채택 등 한국이 주도권을 행사하면서 초기에는 별다른 이견이 노출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북―미대화가 시작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로버트 갈루치 국무부군사담당차관보와 강석주외교부부부장을 수석대표로 하는 미국 북한 대표단이 뉴욕에서 처음 마주 앉은 것은 그해 6월2일. 북―미 양측은 열흘간의 줄다리기 끝에 6월12일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안전보장, 북―미간 공식대화 계속, 북한의 NPT 탈퇴유보 등이 골자였다.
이 합의에 대해 국내에서는 비난여론이 들끓었다. 미국이 너무 많이 양보했다는 것이었다. 여론을 중시하는 김대통령도 영국 BBC와의 회견에서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북한은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해 미국과의 협상을 이용하고 있다. 미국이 더이상 북한에 끌려다니지 않기를 바란다.”
김대통령의 공개비난에 충격받은 미국이 한국정부에 항의해오면서 한미간 갈등의 골은 깊어갔다.
정부의 아이디어로 북―미대화가 시작됐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 정부 안에서는 강경파와 온건파가 북―미협상 진행상황을 놓고 사사건건 대립했다.
특히 김대통령이 여론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북한과의 싸움이 아니라 미국과의 신경전 양상으로 번지는 경우가 빈발했다.
북한 핵문제가 터진 뒤 한승주외무장관과 한완상(韓完相)통일부총리는 대화를 통해 핵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온건론을 지지했다. 그러나 박관용(朴寬用)청와대비서실장 정종욱수석 권영해(權寧海)국방부장관 등은 ‘한국의 어깨 너머로 북한과 미국이 뒷거래를 한다’는 의구심과 함께 강경론을 제기했다. 워싱턴 정상회담 때 유종하대사를 불러 대통령에게 상호사찰을 강조토록 한 것도 외무부를 견제하려는 박실장의 ‘작품’이었다.
김대통령이 핵문제와 관련해 우왕좌왕한 데는 강온파의 대립도 한몫을 했다. 김대통령이 누구의 보고를 먼저 받느냐에 따라 오락가락했다고 관계자들은 말했다.한 관리의 설명.
“북―미협상이 본격화되면서 수시로 상황이 변했습니다. 김대통령은 강경파로부터 먼저 협상 진행상황을 보고받으면 북한과 미국에 대해 강한 불만을 제기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긴장이 고조되면 전쟁발발 위험이 있다고 온건론자들이 설득하면 다시 태도가 달라지곤 했어요. ‘김대통령의 머리는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라는 농담이 오간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의 불만이 고조되자 미국도 나름대로 대책을 마련했다. 한국의 훈수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자세에서 벗어나 북한에 대한 ‘과외공부’를 시작했다. 옛통일원 고위관리 출신의 증언.
“북한 핵문제에서 소외됐던 통일원은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주한 미대사관의 1등서기관이 어느날 외무부와 미국무부 사이에 오간 전문(電文)을 보여주면서 북한 다루는 방법을 물어왔습니다. 통일원은 외무부가 장악하고 알려주지 않는 긴급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정부내 협의상황과 대북 대응법 등을 미국측에 조언해주었습니다.”
미국이 부처간 이견을 교묘히 이용해 대북협상의 주도권을 잡아나간 것이다. 갈수록 한국의 목소리가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전쟁발발 위기가 조성되는 우여곡절이 계속됐지만 한미간의 갈등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김대통령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94년 7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시작된 북―미 3단계 회담은 미국의 독주로 진행됐다.
11월의 상하원선거를 앞둔 클린턴행정부가 북한의 과거 핵의혹 규명을 사실상 포기한 채 핵개발을 동결하는 선에서 핵협상을 마무리하기 위해 서둘렀기 때문.
외무부 관리는 “우리가 과거 핵의혹 규명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요구했지만 김대통령한테서 ‘대북 경수로 지원 보장 친서’를 받은 미행정부는 우리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북한과 미국은 10월21일 ‘북한이 핵개발을 동결하는 조건으로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제네바 합의에 서명하면서 북한 핵문제는 일단락됐다. 핵문제의 발단이 됐던 과거 핵의혹은 경수로의 주요부품이 인도될 때까지 유예된 채 경수로 건설비용의 대부분을 우리가 부담하게 된 것이다.
결국 핵문제의 본질은 놔두고 김대통령이 미국과 갈등을 빚는 바람에 소탐대실(小貪大失)하고 핵문제는 아직도 ‘진행중’인 상태가 된 셈이다.
〈이동관·김차수기자〉dk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