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핵개발을 둘러싸고 한반도 긴장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던 94년6월18일 오전11시30분.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청와대 본관 접견실에서 이날 평양방문을 마치고 서울에 온 지미 카터 전미국대통령과 마주 앉았다.
카터전대통령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김일성(金日成)주석이 ‘아무 조건없이 김대통령을 만날 수 있다고 전해달라’고 말했습니다. 정치적으로 복선이 있는 것 같지 않은 만큼 성사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김대통령의 표정은 상기됐다. 김대통령은 즉석에서 되물었다.
“당신 얘기를 언론에 공개해도 좋습니까.”
평생 여론과 언론에 대해 뛰어난 감각으로 정치를 해온 김대통령다운 반응이었다. 카터전대통령은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카터전대통령은 김대통령과의 청와대 오찬이 끝난 직후 주한미대사관에서 기자회견을 할 예정이었다.
이날 카터전대통령과의 30분에 걸친 회동자리에서 김대통령은 수락여부에 대해서는 즉답을 피했다. 그러나 이어 낮12시부터 손명순(孫命順)여사와 카터전대통령의 부인 로절린여사 그리고 박관용(朴寬用)비서실장 등 비서진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오찬석상에서 카터전대통령이 김일성의 제안을 공식적으로 전하자 김대통령은 즉석에서 “좋다. 정상회담을 하겠다”고 수락의 뜻을 밝혔다.
오찬 직전 회담에 배석했던 한승주(韓昇洲)외무장관과 정종욱(鄭鍾旭)외교안보수석비서관을 제외한 모든 비서관들은 카터전대통령의 ‘뜻밖의 선물’에 놀랐고 김대통령의 ‘전격적인 수락’에 다시 한번 놀랐다.
한 청와대 핵심 관계자의 술회.
“솔직히 김대통령이 정상회담을 수락한 초기 단계에는 비서진 내부에서도 북한의 전략에 말려들지 모른다는 점에서 신중론이 우세했습니다. 특히 김대통령이 오찬석상에서 선뜻 수락의사를 밝히자 일부 수석비서관들은 비서진과의 협의도 없이 제안을 덜컥 받아들인 데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죠.”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달리 남북정상회담의 중재는 카터전대통령의 독자적인 작품은 아니었다. 카터전대통령의 방북에 대해서는 빌 클린턴 미행정부내에서도 마땅찮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승주 당시 외무장관의 증언.
“카터전대통령이 6월15일 판문점을 통해 입북하기 직전에 찾아가 만났습니다. 그가 ‘북한에 가면 무슨 얘기를 했으면 좋겠느냐’고 묻기에 ‘김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제안한 남북정상회담이 아직도 실효성이 있는 제안이란 점을 설명하고 김일성에게 정상회담에 응할 뜻이 있는지를 타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한장관은 카터전대통령이 평양방문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직후에도 주한미대사 관저로 그를 찾아갔다. 그는 방북결과를 설명들은 뒤 “정상회담과 관련해 상당한 진전이 있는 것 같다”고 김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김대통령은 남북회담의 성사가능성에 대해 카터전대통령으로부터 직접 김일성의 메시지를 전해 듣기 전에 이미 ‘감(感)’은 잡고 있었던 셈이다.
문제는 비서진도 모르게 일을 추진해 전격적으로 밀어붙이는 김대통령의 스타일이었다.
아무튼 남북정상회담을 기정사실로 만들기 위한 김대통령의 의욕과 핵사찰 거부를 응징하기 위한 미국의 ‘압박전략’속에서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던 북한의 필요가 맞아 떨어진 것으로 풀이됐으며 회담준비는 급속하게 진척됐다.
카터전대통령이 김일성의 메시지를 전한 지 이틀만인 6월20일. 이영덕(李榮德)국무총리 명의로 보낸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예비접촉 제안’에 북한은 이틀만에 응낙의사를 밝혀왔다.
정상회담 개최에 북한측이 더 절박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던 측면도 있었다.
카터전대통령의 방북을 전후해 미국방부는 영변의 핵시설을 폭격하기 위한 극비대책 마련에 착수하는 등 북한을 제재하기 위한 작전이 초읽기에 들어갔던 것으로 알려졌다.
워싱턴 포스트지의 외교전문기자 출신인 돈 오버도프가 올해 발간한 저서 ‘두개의 한국’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국방부와 합참은 한반도에서의 전면전에 대비해 주한미군의 증강방안을 담은 ‘작전계획 5017’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는 것이다.
카터전대통령이 방북중이던 6월16일에는 게리 럭 주한미군사령관과 제임스 레이니 주한미대사가 극비리에 회동해 주한미군 가족과 군속의 소개가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레이니대사는 당시 한국에 와있던 딸과 3명의 손자 손녀에게 ‘사흘안으로 한국을 떠나라’고 말했다는 후문이다.
김대통령의 한 측근은 “6월 중순경 레이니대사가 청와대로 김대통령을 방문해 ‘미군속 및 가족의 소개방침을 언론에 발표하겠다’고 요청했다가 김대통령의 강력한 거부로 무산된 일이 있다”고 소개했다. 그만큼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일촉즉발의 형국이었다. 결국 김일성의 남북정상회담 수용은 이런 긴박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일종의 카드였던 것으로 풀이된다.
김대통령도 나름대로 임기초부터 추진한 유연노선이 여론의 역풍(逆風)에 부닥치자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살려내야 한다는 강박감에 빠져 있었다. 김대통령이 얼마나 정상회담의 성사에 집착했는지는 자신의 평양행을 흔쾌히 수락한 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당시 청와대와 안기부 통일원 등 실무진의 의견은 ‘김일성이 서울로 오는 게 국민감정에 맞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대통령이 6월28일로 예정된 1차 예비접촉을 앞두고 이홍구(李洪九)부총리, 정종욱수석, 윤여준(尹汝雋)안기부장특보 등 우리측 대표단에게 당부한 것은 단 한가지였다. 회담기일을 ‘사흘 이상’으로 하되 못박지 말라는 것.
윤특보는 “김대통령은 평양행에 대해서는 ‘나는 북한에 들어갈 수 있지만 김일성은 노령이어서 서울에 오기 어렵다.(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회담을 가져야 한다는) 상호주의를 주장하되 그것 때문에 회담을 결렬시키지는 말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측근들에게 “김일성이 노령인데 서울에 와서 회담을 하다가 죽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니냐”는 걱정까지 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경호실측에서 평양내에서의 경호문제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자 “기자들과 같이 가지 않느냐. 기자들이 나를 경호할 것”이라고 태연하게 말해 관계자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김대통령이 회담기일에 융통성을 둘 것을 고집한 것은 기일을 연장해서라도 반드시 가시적 성과를 거두겠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었다.
한 측근은 “김대통령은 오랜 야당생활을 통해 길러온 승부사 기질로 담판에 자신을 갖고 있었다”며 “인적 물적 교류의 실현 등 무언가 얻어내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여러차례 밝혔다”고 말했다.
결국 6월28일 1차 예비접촉에서 우리측 주장대로 회담기일은 사흘로 하되 필요에 따라 연장하자는 데 합의가 이루어졌다.
회담장소와 날짜가 타결된 다음날인 6월29일. 정종욱외교안보수석은 “이번 회담은 기자회견하는 식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원고를 보지 않고 말하다가 김일성의 말재간에 끌려들면 큰일납니다”라며 반드시 시나리오대로 읽을 것을 김대통령에게 간곡히 건의했다.
이에 따라 김대통령은 7월초부터 수시로 관계기관 실무자들을 청와대로 불러 ‘과외수업’을 받았다. 가상의 김일성을 앞에 놓고 담판연습을 하기도 했다. 북한에 쌀 50만t을 지원한다는 ‘깜짝선물’도 준비해 놓았다는 것이 오버도프의 이야기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대부분의 경우 참모들이 장황한 자료 설명을 하려들면“내게도 다 생각이 있다”며 손을 내젓곤 했다.
참모들이 가져온 자료를 토대로 혼자만의 구상에 골몰하는 시간이 많았다는 것이 측근들의 전언이다. 김대통령이 ‘홀로 앞서 뛰는’ 모습이었다.
김일성도 김대통령을 상대하는 데 신경을 많이 쓴 것은 사실인 듯하다. 당시 일본 언론들은 ‘김일성이 회담에 앞서 13차례나 참모회의를 가졌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회담을 준비하던 김일성이 7월8일 오전2시 묘향산 별장에서 쓰러져 숨졌다. 한반도에서 벌어질 수 있는 최대의 정치행사인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되고 말았다.
북한관리들이 추후 방북인사들에게 밝힌 증언내용에 따르면 김일성은 7월7일 묘향산에 도착한 뒤 김대통령이 묵을 별장의 침실과 욕실까지 직접 점검했다. 냉장고에 광천수를 넣어둘 것까지 일일이 지시했다는 것. 그 뒤 저녁식사를 마치고 갑자기 심장발작으로 쓰러졌다.
마침 쏟아진 폭우로 헬기 비행이 불가능했고 도로마저 흙탕으로 변해 의사들이 뒤늦게 달려가 김일성의 흉부를 절개하고 소생시키려 했지만 허사였다는 후문이다.
〈이동관·김차수기자〉dk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