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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돋보기답사]본이름 잃은 문화유산들

입력 | 1998-07-26 20:49:00


남대문 동대문 비원 수원성 경판고 에밀레종 덕수궁…. 본명을 잃어버린 우리의 문화유산들.

국보1호는 남대문이 아니라 숭례문(崇禮門), 보물1호는 동대문이 아니라 흥인지문(興仁之門)이다. 조선시대 때부터 남대문 동대문이라 불리기도 했지만 이것은 단순히 방향을 나타내는 이름일 뿐. 문화재위원회는 그래서 96년 이름을 숭례문 흥인지문으로 공식 개정했다.

세계문화유산인 창덕궁의 비원(秘苑)도 잘못된 이름. 후원(後苑)이 옳다. 조선시대에는 창덕궁의 뒤뜰이라 해서 후원, 북쪽의 뜰이라 해서 북원(北苑), 함부로 출입할 수 없다 해서 금원(禁苑) 등으로 불렀고 이중 후원이 가장 일반적인 명칭이었다.

비원이란 이름은 1904년경 일제가 붙인 것이다. 당시 일제는 후원을 비밀스럽고 음흉한 공간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비하시키기 위해 ‘비(秘)’자를 넣어 비원이라 했다. 일제가 창경궁에 벚꽃을 심고 동물원 식물원을 만들어 이름까지 창경원으로 고쳐가며 한낱 공원으로 전락시킨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세계문화유산이자 국보52호인 목조 건축물도 경판고(經板庫)나 장경각(藏經閣)이 아니라 경판전(經板殿)이다. 경판고 역시 일제가 붙인 이름. ‘고(庫)’는 창고를 의미하는 것으로, 대장경의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한 일제의 속셈이었다. 아무런 문제 의식없이 이 이름을 사용해오다 96년 ‘경판전(殿)’으로 바꿔 부르기로 했다.

그러면 왜 ‘전’일까. ‘전’은 왕과 왕비가 업무를 보거나 생활하는 건물 또는 부처님을 모시는 건물에 사용하는 명칭.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보통 사찰의 대웅전이 그 예다. 경판전이란 이름은 따라서 팔만대장경의 높은 가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장경각의 ‘각(閣)’도 ‘전’과 같은 큰 건물의 부속 건물을 칭하는 것으로, ‘전’보다 그 격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

또다른 세계문화유산이자 조선후기 성곽 건축물의 최고 걸작인 수원성. 18세기말, 신도시를 만들어 조선 개혁과 근대화의 터전으로 만들려던 정조의 꿈이 서린 이곳도 본래 이름은 화성(華城)이다.

국보29호 에밀레종은 전설에서 비롯된 속칭(俗稱)이 본명을 압도해버린 경우다.

통일신라때 가난한 부인이 시주한 아기를 구리와 함께 녹여 종을 만들었기 때문에 종을 칠 때마다 에밀레 에밀레(‘엄마 때문에’라는 뜻) 하는 울음소리가 들렸다는 슬픈 전설. 그러나 엄연히 이 종의 본명은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이다.

덕수궁(德壽宮)도 이전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었다.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1897년부터 경운궁에서 생활하던 고종이 다음해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이름을 덕수궁으로 바꿨다는 것이 정설. 조선시대에는 왕위에서 물러난 선왕의 만수무강을 비는 뜻에서 그가 기거하던 궁궐을 ‘덕수궁’ ‘수강궁(壽康宮)’이라 부르곤 했다. 그래서 덕수궁이란 이름 역시 남대문 동대문처럼 일반명사이기 때문에 경운궁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광표기자〉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