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정부가 출범한 직후부터 정부내에서는 김영삼(金泳三·YS)대통령에게 노벨평화상을 ‘헌상’하기 위한 움직임이 조직적으로 벌어졌다.
김대통령의 민주화 투쟁경력과 문민정부의 개혁작업에 대한 국내외의 높은 평가를 잘 홍보하면 승산이 있다는 게 노벨평화상 수상을 추진한 일부 측근들의 판단이었다.
김대통령의 묵인 아래 노벨평화상 수상 작업이 시작되면서 부처간 갈등과 인사파행이 속출하고 외교적 마찰까지 빚어졌다.
특히 김대중(金大中·DJ)민주당총재가 88년부터 해마다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면서 YS―DJ 진영 사이에서는 경쟁 양상도 보였다. 김대중총재측이 노벨평화상 수상을 위해 로비를 하거나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은 아니지만 평화상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
그러나 김대통령이 한국인 ‘단일후보’로 추천돼야 수상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은 뻔한 이치였다. 정부 관계자들은 그래서 김대통령에 대한 홍보와 함께 ‘DJ 흠집내기’공작을 은밀히 진행했다.
프란시스 사이스테드 노벨평화상 심사위원장과 친분이 있는 정치학자 C교수의 경험담.
“93년 여름 미국 스탠퍼드대에 교환교수로 가 있었는데 문민정부 고위직 인사한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어요. 예전부터 잘 알던 그 인사는 다짜고짜 ‘빨리 귀국해서 도와달라’고 서둘렀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김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추진중인데 사이스테드위원장과 접촉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어요. 내가 사이스테드위원장의 올곧은 성품으로 봐서 로비를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고 노벨평화상은 로비로 탈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설명하자 수긍하는 눈치였습니다.”
정부 고위인사가 C교수에게 부탁을 한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C교수가 92년 9월 사이스테드위원장을 서울로 초청했을 정도로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
사이스테드위원장은 4일간 서울에 머무르면서 고려대에서 강연을 하고 판문점도 시찰했다. 그가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한반도의 분단과 갈등을 극복하는 데 기여하는 개인이나 단체가 나타나기를 기대한다”고 얘기한 사실이 알려지자 노벨평화상을 추진하던 문민정부 관계자들이 그에게 줄을 대기 위해 비상이 걸린 것이다.
이어지는 C교수의 증언.
“사이스테드위원장은 정부 관계자들을 절대로 만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서울에 왔습니다. 그런데 노태우(盧泰愚)대통령과 김대중민주당총재쪽에서 만나게 해달라는 부탁이 왔어요. 또 모 사립대총장이 사이스테드위원장이 묵고 있던 호텔방에 화려한 꽃바구니를 넣었는데 사이스테드위원장은 오히려 불쾌해 했어요.”
김대통령에게 노벨평화상을 헌상해 한건 하기로 마음먹은 정부 관계자들은 사이스테드위원장에게 직접 줄을 대는 데는 실패했지만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노벨평화상 심사위원회가 있는 노르웨이를 직접 공략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80년대 노르웨이에서 3년간 근무하고 오슬로대에서 2년 동안 연수한 적이 있는 안기부 파견관 C씨가 선발대로 뽑혔다.
노르웨이어를 할 수 있는데다 유력인사들과 친분이 있다는 점이 고려된 것. 93년 10월 노르웨이대사관에 부임한 C씨는 김대통령에게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노벨평화상 작업은 동료외교관들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철저히 비밀리에 이뤄졌다.
C씨와 함께 근무했던 한 외교관은 “C씨가 주로 노벨평화상과 관련된 현지인들이나 언론인과 활발히 접촉했지만 본국과 오가는 전문(電文)내용은 동료들도 전혀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C씨는 노벨평화상 로비와 관련해 외무부에서 나간 외교관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외무부의 한 고위관리는 “안기부 파견관이 노르웨이 주재 C대사가 노벨평화상과 관련한 활동을 소홀히 한다는 정보보고를 자주 한다는 얘기가 외무부에 파다했다”고 회고했다.
대사 인사문제를 놓고 안기부와 외무부 사이에 마찰도 빚어졌다. 정보 판단력과 로비력이 뛰어난 안기부 간부 출신을 노르웨이대사로 보내야 로비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게 노벨평화상을 추진하는 사람들의 주장이었다.
당시 한승주(韓昇洲)외무부장관은 노르웨이대사를 바꾸라는 압력을 수차례 받았으나 “조기에 바꾸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면서 대사 조기교체를 거부하고 버텼다고 외무부 관계자들은 전했다.
한장관은 대사를 바꾸는 대신 94년 8월 유럽을 순방하면서 현안이 없던 노르웨이를 직접 방문했다. 한장관이 노르웨이에서 노벨평화상 관계자들과 직접 만나지는 않았지만 한국에 대한 관심과 이미지를 제고함으로써 노벨평화상 수상에 필요한 정지작업을 한 셈이다.
그러나 94년 10월 21일 북한과 미국의 제네바 기본합의서 서명으로 북한 핵문제가 일단락되면서 노르웨이 대사를 교체하라는 압력은 더욱 가중됐다.
노벨평화상을 추진했던 사람들은 제네바 기본합의로 한반도 긴장완화의 물꼬가 트였다고 보고 로비를 본격화해야 할 적기로 판단했던 것이다.
94년 12월 한장관이 물러나고 공로명(孔魯明)주일대사가 외무장관에 취임한 뒤 한달만인 95년 1월 노르웨이 대사가 교체됐다. C대사가 부임 1년1개월만에 결국 본국으로 불려 들어온 것. C대사를 차관보급인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부장에 승진기용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문책성 조기소환이었던 셈이다.
노벨평화상 작업을 둘러싼 안기부와 외무부의 갈등이 인사파행으로 이어진 것이다.
C전대사는 “노벨평화상에 얽힌 소문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 와서 무슨 얘기를 하겠느냐”며 자신과 관련된 상황에 대한 증언을 꺼렸다.
대사를 조기소환하자 노르웨이 정부는 한국 정부에 공식 항의했다. 외무부 관계자의 설명.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보통 대사의 임기를 3년으로 하는 게 외교관행인데도 정부가 이를 무시하고 대사를 소환하자 노르웨이 정부는 무시당했다고 생각해서인지 강한 불쾌감을 나타냈습니다.”
무리한 대사 소환은 2002년 월드컵 유치과정에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정몽준(鄭夢準)축구협회장의 회고.
“2002년 월드컵 유치 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노르웨이 집행위원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대사 소환을 이유로 오히려 항의했어요. 노르웨이 정부는 대사 교체에 대해 외교적으로 모욕을 당했다는 분위기였습니다. 한표가 아쉬운 마당에 난감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C대사가 소환된 뒤 권영민(權寧民)애틀랜타총영사가 후임으로 전보됐다. 권대사는 애틀랜타총영사 시절 애틀랜타에 있던 마틴 루터 킹 인권재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덕분에 김대통령이 ‘마틴 루터 킹 비폭력 인권평화상’을 수상하는 데 일조했다는 게 외무부 주변의 평가였다.
외무부 관계자는 “권대사가 노르웨이대사에 임명됐을 때 노벨평화상 로비 특명을 받고 간다는 얘기가 많았다”고 말했다.
권대사가 부임하자 노르웨이대사관은 활발하게 움직였다. 김대통령이 95년 3월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6개국을 순방하면서 노르웨이를 방문하지도 않았는데 유력신문인 다그블라트는 김대통령에 대한 특집기사를 실었다.
안기부는 나중에 이 기사가 안기부 파견관 C씨의 로비에 의한 것이라는 보고서를 청와대에 올렸다.
그러나 C씨는 “내가 노르웨이대사관에 다시 근무하게 된 것은 지역전문가로서 간 것일 뿐 노벨평화상 로비와는 직접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누가 노벨평화상 작업을 주도했을까.
당시 노벨평화상 작업에 직간접적으로 관계됐던 인사들은 안기부내 김현철(金賢哲)라인이 주도하고 청와대에서 측면 지원하는 식으로 진행됐던 것 같다고 증언한다. 외무부 고위 관계자의 술회.
“안기부에서 남북관계가 잘 풀릴 것으로 보고 김대통령에게 노벨평화상 추진계획을 보고했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외무부가 나서서 로비를 하도록 압력을 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안기부에서 인사압력을 넣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청와대 관계자들이 가세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문민정부 초대 안기부장을 지낸 한나라당 김덕(金悳)의원은 “안기부가 노벨평화상 계획에 조직적으로 개입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는 “한국인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면 남북 긴장완화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내가 그 가능성을 알아본 적은 있지만 안기부가 로비를 주도하거나 외무부에 압력을 넣은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의 한 핵심측근은 “김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욕심냈다기보다는 과잉충성하려는 사람들이 노벨평화상을 탈 수 있다고 김대통령에게 바람을 불어넣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동관·김차수기자〉dk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