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발발 45주년인 95년 6월25일.
강원도 동해항에서는 역사적인 행사가 열렸다. 북한에 무상으로 지원하기로 한 쌀 15만t 가운데 첫 선적분인 2천t을 실은 씨 아펙스호의 출항식이 열린 것.
출항식이 6·27 지방선거를 이틀 앞두고 전격적으로 이뤄진 탓인지 정부는 쌀지원의 의미를 한껏 부각시키려고 애썼다. 남북간 경제력 격차 확인과 북한 동포 지원이라는 인도적 의미 때문에 쌀 무상지원에 대한 여론도 그리 부정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북한 청진항에 입항하던 씨 아펙스호가 인공기를 게양하도록 강요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분위기는 돌변했다. 문민정부 대북정책의 하이라이트로 관심을 모았던 쌀지원이 김영삼(金泳三)정부에 치명타를 가하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통일원 고위간부 출신 인사의 증언.
“박용도(朴鎔道)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사장이 6월25일 베이징(北京)에서 북한측과 쌀지원 계약서에 서명한 뒤 씨 아펙스호가 이날 오후 출항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출항 30분이 지나서야 서명이 이뤄졌습니다. 씨 아펙스호는 항로 등에 대한 합의사항도 모른 채 출항한 셈입니다. 인공기 강제 게양사건도 씨 아펙스호가 구체적인 지시를 받지 못해 일어난 것입니다. 인공기 강제 게양 소식을 듣는 순간 아찔했습니다. 남북관계에 역풍이 우려됐지만 통일원으로서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당황했습니다.”
당황한 것은 통일원뿐만이 아니었다. 유종하(柳宗夏) 당시 청와대외교안보수석비서관은 “나는 씨 아펙스호사건이 나기 전까지는 대북 쌀지원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면서 “인공기 강제 게양사건이 터졌는데도 누구하나 책임지거나 대응책을 결정하려는 사람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유전수석의 증언.
“씨 아펙스호가 청진항에 쌀을 내려놓고 북한 영해를 벗어난 것이 바로 삼풍백화점이 붕괴된 6월29일이었습니다. 저녁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있는데 밤 9시 TV뉴스에 ‘북한측으로부터 인공기를 게양하도록 강요당했다’는 씨 아펙스호 선장의 육성이 그대로 방송됐어요. 관계부처 장관들과 협의해봤지만 누구도 대응책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대통령께 직접 보고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밤 10시반쯤 관저로 전화를 걸었어요. 그런데 대통령께서 삼풍사고 때문에 하루종일 시달리다가 잠자리에 들면서 깨우지 말라고 하셨다며 바꿔주지 않더군요. 전화를 끊고 한참 생각해봤지만 안되겠다 싶어서 밤 11시경 다시 전화를 걸어 큰일 났으니 꼭 통화해야 한다고 해서 주무시던 분을 깨워 보고했습니다.
씨 아펙스호 선장의 육성이 방송되는 바람에 엄청난 파장이 예상되므로 쌀을 싣고 북으로 향하던 배 두척을 회항시키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지요. 대통령께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하셨는지 즉각 회항시키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북한으로 가던 배에 회항을 지시할 길이 없었다. 선박회사에서 배와 통신하는 것과는 별도로 정부차원에서 통신수단을 확보해놓지 못한 때문이었다.
유전수석은 “밤이라 선박회사에 사람이 없어 회사간부를 찾았지만 연락이 안되는 바람에 청와대 상황실에서 비상수단을 강구했다”면서 “공군 헬기와 군함을 북한해역 50㎞ 지점까지 가있던 쌀수송선에 접근시켜 고성능 마이크로 회항지시를 내렸다”고 비화를 소개했다.
왜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을까. 대북 쌀지원 협상이 지나치게 보안을 강조한 나머지 공조직이 배제된 채 비선을 통해 졸속으로 진행된 탓으로 보는 풀이가 많다.
안기부장 특보 출신의 남북문제 전문가인 이동복(李東馥)의원의 증언.
“북한에 쌀을 주고도 뺨을 맞은 꼴이 됐으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 경위를 알아봤습니다. 협상과정이 엉망이었습니다. 쌀지원 협상은 초기에 통일원과 안기부조차 배제된 채 청와대가 비선조직을 동원해 첩보작전이라도 벌이듯 진행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남북한을 오가는 재미동포와 재일동포가 ‘일본에서 쌀을 주겠다고 했는데 남한이 비밀리에 쌀을 주면 받겠다’는 내용의 북한 뜻을 청와대에 전달하면서 협상이 시작됐다는 겁니다. 이들은 특히 북한이 협상을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하자고 요구하고 있으므로 보안을 위해 안기부나 통일원을 개입시키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는 충고까지 했다는 겁니다. 이에따라 정상회담과 이산가족찾기 등 남북관계 진전에 기대를 걸고 있던 김대통령이 비선조직을 가동하게 된 것입니다.”
김대통령은 3월7일 독일 베를린 방문중 대북 곡물 원자재 제공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북한의 반응은 냉담했다. 북한은 5월말에 가서야 비선으로 활동하던 동포들을 통해 쌀지원 수용의사를 밝힌 뒤 조선삼천리총회사를 내세워 KOTRA와 곡물지원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비밀협상 과정에는 한승수(韓昇洙)청와대비서실장과 이석채(李錫采)재경원차관, 그리고 KOTRA 북한실장인 홍지선(洪之璿)씨 등 3명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실장은 대북협상을 총괄지휘했고 이차관이 협상대표로 실무를 담당했으며 홍실장은 대북접촉 창구역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한전실장은 최근 “재미동포를 통해 대북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쌀지원 문제를 총괄하지는 않았다”면서 “프로젝트 내용은 아직 공개할 시기가 아니다”고 말했다.
안기부 고위간부 출신의 한 인사는 “6월17일 열린 1차 베이징회담 직전까지 안기부조차 대북 쌀지원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이 인사의 증언.
“하루는 權寧海(권영해)부장이 간부회의를 소집했어요. 이석채차관이 중요한 임무를 띠고 베이징에 가야 하는데 안기부는 개입하지 말고 측면지원만 하라는 지시를 김대통령에게서 받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의견을 묻더군요. 당연히 안기부 등 관련부처가 나서지 않으면 낭패를 당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지요. 권부장이 김대통령을 다시 독대해 정부 대표단을 구성해 파견해야 한다고 설득한 끝에 안기부 통일원 등의 실무자 7명으로 대표단이 급조됐습니다. 베이징 쌀회담은 청와대에서 주도했는데도 안기부가 주도했다는 오해를 산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6월17일 이석채차관을 수석대표로 한 베이징회담 대표단이 서울을 출발했다.그러나 정부는 북한의 비공개 요구 때문에 쌀지원 회담 자체를 부인했다. 쌀을 주는 남한이 우위에서 협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실제협상은 북한 주도로 진행됐다는 게 당시 협상대표단으로 갔던 한 인사의 회고다.
“북한측 수석대표인 전금철은 첫 모임에서 기왕에 쌀을 주려면 많이 줄수록 좋다며 1백만t을 요구했습니다. 우리 대표단은 깜짝 놀랐습니다. 결국 15만t을 무상지원하기로 합의했지만 협상과정은 우리가 끌려가는 양상으로 전개됐습니다. 북한이 회담내용을 녹음하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회담록조차 현장에서 작성하지 못하고 나중에 단편적인 기록과 기억에 의존해 회담록을 만들었어요.”
비선접촉을 통해 북한의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미리 약속하는 바람에 베이징회담은 남한이 채무자가 된 것 같은 형국으로 진행됐다.
정부가 회담을 서두른데는 이유가 있다. 첫째, 북한과 일본의 대북 쌀지원협상이 상당히 진척되는 상황에서 정부는 일본보다 먼저 쌀을 지원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었다. 둘째, 임박한 ‘6·27’지방선거를 겨냥한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다.
인공기사건으로 쌀지원이 중단됐으나 북한의 사과로 7월15일 제2차 베이징회담이 열렸다. 2차 회담에서는 쌀 추가지원에 대한 합의는 없었고 경공업분야의 투자확대, 비료와 농약제공 등 남북경협에 대한 의견만 교환했다.
그러나 8월2일 쌀을 싣고 청진항에 입항한 삼선비너스호 억류사건이 발생했다. 1등 항해사 이양천(李良天)씨가 청진항을 촬영하다 적발됐는데 계획적인 정탐행위라는 게 북한의 억류 이유였다. 삼선비너스호가 8월13일 풀려나긴 했지만 여론은 극도로 악화했다.
우여곡절끝에 당초 합의대로 쌀 15만t을 모두 지원했지만 쌀지원이 남북관계 개선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통일원 간부의 술회.
“대북 쌀지원은 민족사에 기록될 만한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비밀 졸속협상에 따라 역사적 의미가 퇴색했을 뿐만 아니라 여당이 ‘6·27’지방선거에서 대패하고 남북간 불신만 깊어졌습니다. 쌀지원이 결국 실패한 것은 남북관계에서 한건주의가 얼마나 무모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동관·김차수기자〉dk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