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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관도예전/외교안보원 윤덕민교수 특강]

입력 | 1998-07-30 19:38:00


《윤덕민(尹德敏)외교안보원교수가 29일 오후 일민미술관(동아일보 광화문 사옥)에서 심수관가 도예전을 기념하는 특별강연회를 가졌다. 윤교수는 조선에서 도자기를 전수받아 그 경제적 가치를 살려나간 일본과 그렇지 못했던 조선을 비교하며 심수관가 도예전이 주는 역사적 교훈을 되새겼다. 다음 강연은 8월5일 김장용(金將龍)중앙대교수의 ‘심수관 도자기의 미학’.》

‘4백년만의 귀향―심수관家 도예전’을 둘러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왜 같은 뿌리를 가진 조선의 도공들이 만들었는데 정작 조선의 것과 이렇게 큰 차이가 날까.’

도자기는 그 민족의 삶과 역사를 담고 있다. 조선과 일본의 도자기를 대조해 보면 그 민족성을 가늠할 수 있다. 조선의 자기는 색과 모양, 문양이 정형화되어 있다. 그만큼 표현을 억제했다. 반면 일본의 자기는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모양도 매우 현란하다.

또 조선은 왕조가 바뀔 때마다 시대가 단절된 개념의 도자기가 나왔다. 고려의 청자와 조선의 백자를 보라. 청자는 세계적 명품인데도 조선 시대에 와서 제작 기법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왕조가 바뀌면 과거를 송두리째 부정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초기 토기시대 때 크게 변한 적이 있으나 대체로 과거의 것을 계승, 발전시켜왔다.

그리고 한일 도자사(陶磁史)에서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도자기의 문화산업적 가치를 홀대한 조선과 그렇지 않은 일본의 차이다.

도자기 발전사에서 최고 단계인 자기는 당나라와 고려만이 공유해온 하이테크였다. 고려는 이미 11세기경 그 기법을 보유했다. 일본은 이보다 6백년 뒤인 17세기, 그것도 임진왜란때 끌려간 조선 도공들이 전해 주었다. 유럽은 그보다 더 늦은 18세기. 이렇듯 도자기 역사로만 보면 조선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앞선 선진국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18세기경부터 당시 세계 도자기 시장을 지배하던 중국의 혼란을 틈타 유럽 시장에 진출해 엄청난 경제적 부와 명성을 얻는다.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의 자기’가 유럽의 왕실을 매료시킨 것이다.

조선은 왜 이를 살리지 못했을까.

실리와 현실보다 명분과 이상을 앞세운 주자학, ‘사농공상(士農工商)’에서 보듯 돈버는 일과 기술을 천시하던 사회풍조, 바깥 세계의 변화에 둔감한 관료주의 때문에 조선은 세계적 명품을 가지고도 경제적 실리를 취하지 못했다.

이런 사실은 IMF 시대를 맞은 우리에게 뼈아픈 교훈을 던져준다. 탁상공론만 거듭하다 근대화에 철저히 실패한 1백년전의 조선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정리〓허엽기자〉h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