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 9월 초순 어느날 중국 베이징(北京) 시내의 모 호텔.
북한 노동당 황장엽(黃長燁)비서의 측근인 여광무역상사 김덕홍(金德弘)사장과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차남 현철(賢哲)씨의 측근인 ㈜심우 대표 박태중(朴泰重)씨가 마주앉았다.
김사장이 먼저 “한국으로 망명하겠다”는 뜻을 단도직입적으로 밝히고 나섰다. 김사장은 이어 자신이 직접 쓴 편지를 김대통령에게 전해줄 것을 요구했다.
황비서와 김사장 두사람의 망명의사가 권력핵심부와 연결된 채널에 처음으로 ‘접속’되는 순간이었다.
이날 만남은 황비서측의 요청으로 이뤄졌다. 이미 망명결심을 굳힌 황비서측이 “망명 이후의 신변보장을 위해 최고권력자와 연결된 사람과 만나고 싶다”며 여선교사 K씨(54·전 Y대 강사)에게 부탁해 성사된 것.
K씨는 금강산 개발사업 협의를 계기로 황비서측과 가까워진 인물. 정재계 인사들과 폭넓게 교유(交遊)하고 있던 K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현철씨의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인 박씨를 황비서측에 소개했다.
이에 앞서 황비서측은 이미 96년 7월 자신들의 망명결심을 K씨에게 털어놓고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황비서측의 진의는 권력핵심부에 충분히 전달되지 못했다.
당시 고위급 핵심 관계자의 증언.
“당시 현철씨가 박태중씨를 동행하고 베이징에 간 것도, 김덕홍씨가 김대통령에게 편지를 전해주도록 박씨에게 부탁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현철씨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며 박씨를 오히려 야단치며 황비서 관련 일에서 손을 떼도록 했습니다. 이날 만남은 다분히 박씨의 ‘돌출행동’에 가까웠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는 “김덕홍씨의 편지도 김대통령에게 전달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철씨가 베이징에서 황비서 일행과 만났다는 것은 낭설”이라고 덧붙였다.
이같은 현철씨의 태도변화는 사전보고를 받은 김대통령이 “위험하다”며 현철씨의 직접 개입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안기부 관계자는 “황비서의 망명가능성은 김대통령에게 오래전부터 보고됐다. 그러나 당시 관계당국은 여러 채널로 보고되는 황비서의 망명의사 타진에 대해 ‘북한의 고도의 정치공작’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고 밝혔다.
실제로 황비서의 망명은 당시 관계당국이 갖고 있던 대북(對北)프로젝트 가운데 우선순위 서너번째에 불과했다는 것이 안기부 관계자들의 증언.
황비서의 망명 가능성이 현실감을 띠기 시작한 것은 97년 새해 들어서부터였다.
1월10일경 황비서가 1월30일부터 2월11일까지 일본에서 열리는 주체사상 국제연구회 주최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방일(訪日)한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황비서의 ‘망명 유도공작’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특히 황비서는 1월 중순경 “방일 기간중에 망명을 시도하겠다”는 뜻을 베이징의 관계당국 채널을 통해 우리측에 전했다. 당시 황, 김씨 두사람은 망명에 실패할 경우에 대비해 독약앰풀까지 구해 갖고 다녔다는 후문이다.
이 때를 전후해 관계 당국자들의 입에서 “2월 초 큰 건이 하나 있을 거요”라는 발언이 심심찮게 흘러 나왔다.
다른 고위 관계당국자의 증언.
“황비서의 망명의사를 전해 듣고 돌발상황에 대비해 황비서의 방일 직전에 10여명의 관계요원을 일본에 급히 보냈습니다. 일본측에도 망명에 대비한 협조를 요청해 두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해뒀습니다. 당시 정부는 황비서가 일본에서 망명하면 곧장 서울로 데려올 생각이었습니다. 김대통령이 황비서의 망명을 확신한 것도 1월 중순을 전후한 시기였다고 봐야 할 겁니다.”
황비서의 망명 가능성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는지, 김대통령은 1월 말 일본 벳푸(別府)에서 열린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도 전례없이 대북문제에 강한 자신감을 나타냈다.
그러나 1월30일 오후2시경 나리타(成田)공항에 도착한 황비서 일행의 모습을 TV를 통해 지켜본 관계당국자들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조총련 청년단원들이 비행기에서 내린 황씨의 팔짱을 끼고 엄중경호하는 모습에 “뭔가 잘못돼가고 있다”는 직감이 든 것.
조총련은 수백명의 청년을 동원해 황비서가 머무르는 호텔 복도까지 지키며 출입자들을 일일이 체크했다.
조총련은 당시 황비서가 거물인 점을 감안해 엄중한 경호에 나섰던 것으로 나중에 확인됐다. 그러나 관계당국은 ‘망명계획이 누설된 것이 아니냐’‘북한측의 역공작일 가능성도 있다’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관계당국은 황비서의 일본 체재기간중 극비라인을 통해 ‘일본을 최후의 기회로 생각해야 한다’는 뜻을 황비서에게 여러차례 전했다. 그러나 조총련 청년단의 엄중한 경계 때문에 황비서의 1차 망명기도는 결국 무산됐다.
당초 황비서가 망명하기로 한 ‘D데이’는 인도에서 비동맹회의가 열리는 97년 4월. 회의 개최지인 뉴델리나 중간 기착지인 태국 방콕에서 망명한다는 것이 시나리오였다. 관계당국은 이에 대비해 실무책임자를 현지에 파견해 현장답사까지 마쳐놓았다.
그러나 북한의 사정상 황비서가 예정대로 비동맹회의에 참석하지 못할 가능성이 큰데다 황비서 망명설이 북한채널을 통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북한당국에 누설될 위험성이 높아가고 있었다.
우리측의 초조감도 당연히 커지고 있었다. 일본에서의 망명 결행 시도에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었던 것.
특히 97년 초 노동법 날치기 파동과 한보특혜대출비리사건으로 위기에 빠져 있던 김대통령으로서는 황비서의 망명은 정국 반전을 꾀할 수 있는 호재중의 호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알려지지 않은 비화 한토막.
황비서가 일본에 머무르고 있던 어느날 밤. 김대통령은 시국현안에 관해 가끔 자문하던 재야원로 K씨에게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황비서를 설득해 지금 좀 데리고 들어와 줄 수 없겠습니까.”
K씨는 95년 가을 재미학자의 주선으로 중국 선양(瀋陽)에서 황비서와 만나 장시간 대화를 가진 이후 교감을 나눠온 인물.
미묘한 시점에 국내정치에 이용될 소지가 있다고 판단한 K씨는 이 요청을 거절했다. 이는 김대통령이 황비서의 망명에 대해 얼마나 노심초사(勞心焦思)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사례다.
황, 김씨는 2월11일 일본을 떠나 베이징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인 12일 오전 10시5분 마침내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 영사부를 찾아가 망명을 신청했다.
황비서의 망명은 12일을 전후해 그를 만났던 일부 국내인사들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와 관련해 황비서의 망명에 깊숙이 관여했던 한 민간인사는 “황비서의 망명 마지막 단계에서는 민간채널을 제쳐놓고 안기부가 직접 나서서 관여했다”며 “안기부측의 재촉이 베이징에서의 망명결행에 크게 작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아무튼 이날 오후 열차편으로 북한으로 출발할 예정이었던 황, 김씨는 “김정일동지에게 줄 선물을 사러 백화점에 다녀오겠다”며 북한대사관을 나선 뒤 한국 영사부로 직행했다.
두 사람은 평소 따라붙던 감시원들을 이날 오전 베이징 시내 한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던 국내의 H목사 일행에게 보내 “조금 늦을지 모르니 기다리라”고 전하도록 하는 등 치밀하게 행동했다.
흥미로운 것은 북한대사관측이 당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방심한 듯한 태도를 보인 점이다.
북한대사관측은 12일 정오가 지나면서 황비서의 망명소식이 퍼지기 시작한 뒤에도 외국언론들의 문의전화에 “그런 소리 하지말라. 황비서는 곧 돌아온다”고 대답했을 정도였다.
황, 김씨 두사람만 외출하도록 순순히 허용한 것도 황비서가 자주 베이징을 방문해 지리에 밝은 만큼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방심 때문이었다는 것이 관계당국의 분석이다.
더욱 어처구니없었던 것은 황비서가 타기로 돼 있었던 열차가 떠난 뒤에도 북한대사관측이 북한당국에 허위보고를 한 점이다.
한 관계당국자는 “당일 열차가 떠난 뒤 평양에서 ‘황비서가 망명했다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며 확인을 요청하자 ‘이미 열차를 타고 평양으로 떠났다’고 팩시밀리로 허위보고한 내용이 우리측에 포착됐다”고 밝혔다.
북한대사관측은 끝까지 ‘주체사상’의 뼈대를 세운 ‘공화국 최고의 이론가’의 망명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일까.
결국 당시 감시원들을 비롯한 책임자들은 모두 북한에 소환돼 총살당하는 등 중징계를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동관·김차수기자〉dk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