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조직을 절반으로 줄이고 기업활동을 가로막는 각종 규제를 과감하게 없애자. 공기업을 철저히 민영화하고 금융을 자율화하자. 그렇게 해서 30년 이상 묵은 관(官)주도의 발전모델을 혁파하자.”
이 ‘국가경영체계 대수리(大修理)계획’은 놀랍게도 김대중(金大中) ‘국민의 정부’의 것이 아니라 김영삼(金泳三) ‘문민정부’의 것이었다(동아일보 98년 1월3일자). 그러나 김영삼후보의 싱크탱크였던 ‘동숭동팀’이 입안한 이 개혁프로젝트는 김영삼씨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물거품이 됐다. 그리고 문민정부는 IMF 구제금융사태로 비극적 종말을 맞았다.
사실 김대중정부의 개혁아이템 가운데 김영삼정부가 손대지 않은 것은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김영삼정부는 민주화 세계화 정보화를 비롯해 교육 법조 환경 노사 복지 등 각 부문에서 상당한 문제의식을 부각했다. 부정부패와 정경유착 척결에도 나름대로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변화와 개혁, 정상화, 제2의 건국 등 ‘아름다운 용어’들도 다 동원했다.
▼ 저항 두려워 미룬다면 ▼
그런데도 김영삼정부는 실패했다. 그 실패한 원인을 문민정부의 참모들은 개혁주도세력의 부재, 대통령 1인 결단에 의한 하향식 개혁, 과거청산에 초점을 맞춘 사정(司正), 재벌개혁과 금융개혁의 미흡 등에서 찾았다. 참모된 입장에서 자신들이 모셨던 대통령의 지적 능력을 거론하기는 민망했을 것이다.
김대중정부는 이 김영삼정부의 실패에서 출발했다. 수없이 지적한 대로 김영삼정부는 김대중정부의 반면교사였다. 두 정부에 주어진 시대적 과제와 정치 사회적 여건이 크게 다르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런 점에서 김대중정부가 ‘화합과 도약’을 취임 슬로건으로 내건 것은 개혁을 뒷받침할 환경이 결여돼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아마 김영삼정부의 실패한 사정도 주목했을 것이다.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대중정부는 사정을 미뤘다. 발등에 떨어진 경제회생작업에 부정적 충격을 준다는 고충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도 두려운 것은 ‘저항’이었을 것이다. 특히 정치인 사정이 운위될 때마다 야당측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드는 ‘표적’ ‘보복’시비는 김대중정부의 사정개혁을 더욱 멈칫거리게 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여당측도 과거의 부패관행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을 것이라는 의구심을 자아냈다.
권력을 정치적 목적에 따라 자의적 편의적으로 운용하지 않겠다는 자세는 옳다. 표적사정을 하지 않고 수사과정에서 ‘증거가 드러나면’ 여야를 막론하고 성역없이 처리하겠다는 자세도 좋다. 그러나 그런 원칙만 거듭 되풀이하고 사정을 미적거리는 것은 옳지 않다. 더구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사정설을 흘렸다가 슬그머니 뒤로 물러서는 것은 더욱 옳지 않다.
그래서 지금 여론은 김대중정부의 개혁이 어디 있느냐고 묻고 있다. 몸에 와닿는 것은 고통 뿐이고 개혁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불만이다. 불만은 기득권층과 서민층 양쪽 모두에서 분출하고 있다. 몰락 위기에 처한 중산층의 실망과 이반은 더 두드러져 보인다. 그 증거가 7·21재보선 결과라는 것은 국민회의의 자체분석에서도 지적됐다. 체감개혁의 실종이 개혁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화합’을 위해서 사정을 주저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권력을 편의적으로 운용하는 또 다른 증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진정한 화합은 권력이 도덕적으로 정당하게 행사된다고 인정될 때에 성립할 수 있다. 도려낼 부분은 과감하게 도려내야 국민이 정부를 믿는다. 이런 신뢰없이 개혁에 대한 국민적 동의를 요청할 수는 없는 일이다.
▼ 與 먼저 도덕적 결단을 ▼
특히 정치권 개혁과 사정이야 말로 개혁의 처음이자 끝이라는 점을 정부는 두고두고 명심해야 한다. 정치개혁 없이 사회 경제의 총체적 개혁은 성공하지 못한다. 정치자금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정치인들의 부정 비리가 우리 사회의 도덕성을 밑바탕에서부터 뒤흔들어놓은 원흉이라는 것은 다시 지적할 필요가 없다. 여권(與圈)부터 자신을 개혁의 제단에 바치는 도덕적 결단을 내려야 한다. 사정을 본격화한다면서 과거사나 몇 건 들추는 시늉만 해서는 절대 안된다. 자신의 팔부터 잘라내야 한다.
개혁주도세력을 형성하기 위해서도 김대중정부는 정치개혁을 서둘러야 한다. 김영삼정부가 부패척결과 정치개혁에 실패하고 국민적 화합을 이루지 못한 것은 ‘잘못된 사정’과 정치자금 원죄, 측근의 도덕적 결함 때문이었다. 김영삼정부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사정 자체를 버리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일종의 ‘김영삼 콤플렉스’일 터이다.
김종심(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