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대통령이 취임 1백일 기자회견을 가진 6월5일. 이규성재정경제부장관은 언론사 경제부장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솔직히 지금까지는 외환위기가 워낙 다급해 계기(計器)비행을 할 여유가 없었다. 시계(視界)비행을 하기에도 바빴다.”
그로부터 두달. 지금의 정부 경제운영은 계기비행 상태인가, 여전히 시계비행 상태인가. 그 사이 금융 기업 구조조정의 항로와 운항속도가 설정됐다. 한계대기업 퇴출, 부실은행 정리, 공기업개혁 입안 등에서 중간결과도 나왔다. 은행 합병도 가시화하고 재벌개혁을 염두에 둔 부당내부거래 조사도 진행중이다.
이런 것들은 실패한 시장을 복원하고 금융과 기업의 건전성을 높이기 위해 정부가 담당해야 할 감독기능의 성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에 크게 결여된 부분이 있다. 시장의 자율과 개혁의 자발성이다.
김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조화를 경제운영의 키워드로 내놓았다. 하지만 시장경제가 곧 DJ노믹스는 아니다. 과거 정권들도 입만 열면 ‘시장경제’였다. 그것은 글로벌 스탠더드다.
다만 김대통령이 동어반복으로 들릴 수도 있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병렬한 까닭은 새겨볼 만하다. 자신의 경제관을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노믹스’나 싱가포르의 ‘리콴유노믹스’와 차별화시켜 국내외에 전파하려는 뜻으로 풀이된다. 마하티르와 리콴유는 시장경제를 글로벌 스탠더드와 충돌하는 아시아적 가치관 또는 권위주의와 접목시켰다. 김대통령은 6월 방미중 “아시아적 가치관은 없다”고 좀더 분명한 메시지를 던졌다.
그러면 경제위기의 큰 뿌리인 비민주적 경제운영관행이 현정부에선 충분히 사라졌는가. 관변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기자들이 들어본 각계 의견에는 경제의 관치가 더 심해지고 자율과 창의성은 위축됐다는 지적이 대세다. 정부가 시장의 한 참가자에 그치지 않고 시장 전체를 대신하려는 충동을 자제하지 못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다.
몇달째 부침하며 전망이 불투명한 대기업 빅딜만 해도 당사자들에 의해 그 자발성이 부인되고 있다. 6월초 공동정권 수뇌부가 시한을 코앞에 걸어놓고 관련재벌들의 ‘항복 아닌 항복’을 받아내 대통령비서실장이 이를 기정사실화한 해프닝은 관치빅딜 기록의 한 페이지에 불과하다. 한미정상회담 순간에 빅딜성사 뉴스를 만들어내기 위한 무리수였다. 이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육화(肉化)할 만큼 권력과 정부의 체질이 개혁되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연립여당과 정부 안에 개발시대 이래의 관치습관이 몸에 밴 사람들이 넘쳐 흐르니 체질개혁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은행 부실화의 한쪽 원인제공측인 이들이 금융개혁을 가시화한답시고 은행장 목을 제멋대로 붙이고 뗀다면 관치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는다. 이대로 간다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단지 아름다운 수사(修辭)에 그칠지 모른다. 자율경쟁과 효율을 기본으로 하는 시장시스템의 활성화를 위한 제도적 노력에 언행일치를 보이지 못한다면….
요컨대 시장경제의 계기비행을 가능케 하는 자동항법장치가 아직도 제대로 가동되지 않고 있다. 그 정밀한 설계도조차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시장을 불안케 한다.
배인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