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2차 정재계 회동에서 5대 재벌에 일단 구조조정의 공을 넘기고 이달말까지 자체 구조조정안이 담긴 재계의 ‘작품’을 기다리기로 했다. 특히 이번 회동에서 ‘기업 자율’의 모양새는 살리되 ‘빅딜(대규모 사업교환)’의 구체적 시한을 정함으로써 재계의 구조조정에 정부가 어떤 식으로든 개입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는 평가다. 연초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재벌총수간 5대 합의사항중 가장 미진했던 ‘핵심역량 위주의 사업구조조정’이 이제 상당한 추진력을 얻을 전망이다.
▼정부의 압박공세〓재계는 이달 3일 김대통령의 수석비서관회의 발언에 이어 박태영(朴泰榮)산업자원부장관 이규성(李揆成)재정경제부장관의 잇따른 ‘5대재벌 개혁성과 미흡’ 발언을 통해 정부 공세의 강도를 충분히 감지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어떤 형태로든’ 이달 말까지 5대 재벌은 자체적인 구조조정안을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이날 모임에서 재벌 총수들이 “(구조조정안이)이미 머릿속에 모두 들어있다”고 말한 것도 재계의 달라진 분위기를 반영한다.
박산자부장관은 이날 모임에서 구체적으로 구조조정안에 담을 원칙으로 △비교 열위(劣位)에 있는 기업 △주력업종과 관련이 적은 기업 △경쟁력이 없는데 국내업체끼리 경쟁해 ‘제살 깎아먹는’ 기업 △재벌에 걸맞지 않아 중견 중소기업에 이양하는 것이 바람직한 사업 등을 제시했다. 이 기준에 해당되는 업종으로 자동차 조선 철강 석유화학 발전설비 항공기 반도체 액정화면(LCD) 컴퓨터 철도차량 등 10대 업종이 예시됐다.
박장관은 “세계적인 항공업체의 매출액이 1백억달러인데 국내 5개 업체를 합쳐도 15억달러밖에 안되고 LCD는 향후 막대한 투자비가 드는데 3개 업체가 매달려있다”며 “5대 재벌총수들도 이같은 문제점에 수긍했다”고 밝혔다.
결국 정부가 바라는 수준은 중복과잉 투자된 장치산업과 중화학업종은 업체간 합병이나 빅딜을 통해 1,2개 업체로 전문화하고 재벌업종에 맞지 않는 것은 퇴출하든지 중소기업에 이관하라는 것.
구조조정안에 ‘LG반도체와 삼성전자의 반도체부문 빅딜 등이 포함되느냐’는 질문에 박장관은 “그렇다”며 “구체적인 안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재계가 생각하는 구조조정안〓그러나 이에 대한 재계의 입장은 다소 차이가 있다. 전경련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10대 업종을 합리화대상으로 불쑥 지정하고 이 틀에 맞추라는 것은 조급한 면이 있다”며 “향후 전경련 주도로 정부 학계 등과 국제 산업전망 등을 감안해 협의하기로 했기 때문에 구조조정 대상업종은 추가 조정이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관계자는 실제로 “각 그룹의 협의과정에서 이해관계가 충돌할 경우 구조조정 대상업종 정도만 제시하는 선에서 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경우 5대그룹 주력사가 전면적으로 참여하는 빅딜안은 구체화하기 어렵게 된다. 특히 그동안 ‘삼각 빅딜’에 대해 관련 그룹 모두 ‘현실성이 없다’고 주장해온 만큼 정부가 구상해온 삼각 빅딜의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질 공산이 크다.
구조조정 대상업종을 선정하는 문제도 만만찮다. 이날 회동에서는 ‘구조조정에 앞서 주요산업의 경쟁력 현황과 전망에 대한 치밀한 점검이 필요하다’고 합의했지만 이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크게 엇갈리는 부분. 이를 토대로 구조조정안을 도출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는 얘기. 이 때문에 재계가 ‘안전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도 있다.
다음달 1일로 예정된 기아자동차 낙찰자 선정도 중대변수. 기아자동차에 강하게 집착해온 삼성측이 인수에 성공할 경우 삼성자동차를 매개로 한 5대 그룹간 빅딜은 원점에서 재검토돼야 할 상황이다. 기아가 현대나 대우자동차에 넘어가더라도 중복 과잉산업 정리라는 구조조정의 당초 목표는 달성되기 쉽지 않다.
▼촉진수단은 있나〓가장 큰 문제는 월말에 나올 재계의 ‘작품’ 수준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뾰족한 제재수단 내지 촉진수단이 있느냐는 것. 정부는 9월 이후 재무구조개선약정이나 워크아웃 등을 통해 5대 재벌의 구조조정을 유도한다고 강조하지만 이 방법은 대규모 정리해고에 내몰린 노동계를 설득하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정부가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구조조정을 압박하는 것도 외국투자가와 노동계를 의식한 것이란 평가가 지배적이다.
정부 관계자는 “5대재벌은 회사채 시장 등에서 자금을 차곡차곡 쌓아왔으며 99년 3월 부채비율과 상호지보해소 중간점검 때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며 “정부 공세에 끝까지 버티려는 그룹도 나올 수 있다”고 전망했다.
만약 수단이 마땅찮은 정부가 ‘8월말 시한’을 들어 인위적 구조조정을 강제할 경우 상당한 후유증을 피할 수 없다. 특히 경제외적인 사법적 수단을 동원하면 70, 80년대의 강제적인 산업합리화 조치와 차별성을 잃게 된다.
한편 이날 한 재벌총수는 “실제 빅딜을 추진하려고 보니 특별부가세와 양도세가 엄청나 포기했다”고 밝혀 정부가 이 문제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임에 따라 정부의 빅딜 지원조치도 보다 구체적인 형태를 띠게 될 전망이다.
〈박래정·박현진기자〉eco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