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경제위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모라토리엄(대외 채무 지불유예)까지 선언한 것은 뜻밖이다.
모라토리엄은 채권단이 받아들여야 유효하다. 채권단이 거부하면 그대로 국가 부도가 나고 만다.
그러나 러시아가 서방세계에 대해 가지는 전략적 중요성을 감안할 때 서방의 채권단은 모라토리엄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옐친 정부는 그동안 시장경제를 정착시키려 했으나 실패만 거듭했다. 그래서 국민의 지지도가 떨어지면서 공산당이 다시 인기를 얻는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국가 부도가 나 공산당이 재집권이라도 하는 날이면 전세계가 다시 냉전 체제로 가지 말라는 법도 없다.
▼ 동유럽국 직접 타격 ▼
러시아가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고 있다고 하지만 군사적으로는 여전히 강대국이다.
핵무기도 1천개 이상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도 이런 사정을 감안해 배짱에 가까운 태도로 나오는 것이다.
러시아 경제 위기는 외견상 외환부족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외화 조달이 원활치 못해 외채 상환을 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외화 조달이 안된 이유는 정부의 재정적자가 눈덩이처럼 늘어나 경제운용능력을 의심받은 탓이다. 이 점에서 대기업의 부도와 은행의 부실채권이 누적돼 국제신인도가 떨어진 우리와는 사정이 다르다.
러시아는 기본적으로 경제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
러시아 경제는 공식적 시장기구보다 마피아 등 지하경제가 더 번창하는 기형적 시장경제다. 기업들이 탈세를 일삼고 관료들은 부패하니 경제가 활성화될 턱이 없다. 정부는 세금을 제대로 걷지 못해 재정적자는 계속 늘기만 해왔다.
이제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마당에 그 파급 효과는 어떠할 것인가.
러시아는 경제적으로는 대국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 세계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실물 경제의 경우 러시아는 원유 등 원자재를 주로 수출하는 나라이고 수입 규모도 크지 않아 교역 상대국에 그리 큰 타격을 주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대(對)러시아 수출은 전체 수출의 1.2%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러시아는 과거 위성국가였던 동유럽이나 독립국가연합등과는 역내 교역을 많이 하고 있어 이들 국가는 타격을 받을 것이다. 이들 국가는 우리 기업들이 새로 개척한 수출 대상국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간접적 피해가 예상된다.
금융적인 측면에서 볼 때 러시아는 다른 나라의 금융시장과 깊이 연계돼 있지 않다. 외채 규모가 2천억달러로 많은 편이긴 하지만 금융시장이 취약해 유럽국가 외에는 해외자본의 투자가 많지 않다. 따라서 모라토리엄으로 피해를 볼 나라는 돈을 빌려준 유럽 국가들이다. 이와 같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비교적 고립적인 러시아 경제의 특성 때문에 당장은 세계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그리 크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러시아 사태가 원만히 수습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엄청난 것이 될 가능성이 있다. IMF는 돈이 바닥난 상태라 G7, 즉 서방선진 7개국이 협조해 러시아를 도와야 한다. 그런데 만약 러시아의 정치불안이 계속된다면 G7은 러시아 문제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미국 등 선진국은 러시아를 결코 포기할 수 없으므로 러시아 구제에 총력을 다할 것이다. 이에 따라 아시아보다 러시아를 중시하는 정책을 취할 것이다. 이 경우 세계의 금융자본은 ‘버려진’ 아시아에서 발을 빼려 할 것이다.
이 때 중국의 태도가 중요하다. 러시아의 모라토리엄으로 중국은 위안화를 평가절하할 명분을 얻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위안화가 평가절하되면 중국과 수출경쟁국인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은 다시 타격을 받아 동남아 위기는 재현될 것이다.
▼ 외자금리 상승 대비를 ▼
이와 함께 독일 등 자금 여유가 있던 유럽 국가들이 위축되면서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은 외자조달이 어려워질 것으로 전망된다.
벌써 아시아 국가들의 채권값이 폭락하고 외자 조달 금리가 상승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당장은 큰 충격이 없다 해도 러시아의 모라토리엄은 큰 사건인 것이다.
정책 당국은 구조조정을 서두르는 한편 외환보유고도 가능한 한 많이 확보해두는 것이 최악의 상황을 막는 길이라고 생각된다.
유한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