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족의 한국’은 갔다. 21세기를 준비하는 새 부류는 ‘코쿤족’. 사전적 의미대로 주위를 딱딱한 껍데기로 싸감고 골치아픈 사회와 단절, 껍데기 안에서 ‘안락함’을 추구한다.
▼변종 코쿤족▼ 사회적 의미의 ‘코쿤’은 미국의 마케팅전문가 페이스 팝콘이 ‘불확실한 사회에서 단절돼 보호받고 싶은 욕망을 해소하는 공간’이란 뜻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한국의 코쿤은 ‘불확실한 사회를 사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공간’의 의미가 짙다.
▼자동차 코쿤족▼
권구희씨(30·만트라 개발이사)의 소나타Ⅲ는 교통수단이라기 보다는 ‘마음의 평화’를얻는장소.PC게임의 배경음악을 작곡하는 그는 일이 잘풀리지 않을 때면 ‘소Ⅲ’에 들어와 문을 닫는다. 그리고 향하는 곳은 서울내곡동∼분당고속도로.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가속페달을 바닥까지 밟으며 골치아픈 생각을 떨쳐버린다.
“집보다 차에 있을 때가 편하다”는 그는 자동차를 ‘내 공간’으로 꾸미기 위해 5백여만원을 들여 차 엔진과 내 외관을 뜯어고쳤다. IMF시대에 왠 돈장난? 권씨의 변.
“요즘은 어딜 가나 한숨뿐. 짓누르는 스트레스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공간, 잠시 쉬고 IMF시대와 ‘맞짱뜰 수 있는’ 공간에 개성을 불어넣는 데 천만금도 아깝지 않다.”
▼집 코쿤족▼
매일 퇴근 후 2,3시간씩 5평 남짓한 골방에 틀어박혀 있는 장희경씨(29·쌍용정보통신 대리). 골방에 있는 것은 고급 오디오와 영화감상용 대형스크린 등 2천만원어치의 AV시스템. 입사 4년차인 장씨는 그동안 수입의 25%가량을 이 방에 쏟아 부었다. “연주회장 수준의 음질로 음악을 들으면 어느 순간 가슴이 저려오며 스트레스가 사라진다.” “하루라도 그냥 출근하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그는 밤 늦게 퇴근해도 반드시 음악을 듣고 잠자리에 든다. 골방에서 골아떨어져 새벽에 아내가 깨우러 오기도 여러차례.
▼일터 코쿤족▼
하루 12시간을 차에서 생활하는 택시기사 김희태씨(33·덕수콜택시)는 회사 차량에 6백여만원을 들여 고급오디오, 손님을 위한 TV와 비디오를 설치했다. “택시는 나의 ‘생활의 터전’이다. 수입이 줄었지만 ‘내 세계’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것 자체가 IMF라는 단어를 잊게 해준다.”
사무실에 가족사진이나 영화배우의 사진을 걸어 놓거나 화초를 키우는 사람도 크게 봐서 스트레스와 맞서는 코쿤족의 한 부류.
▼혹시 나도?▼
불안한 사회에서 나만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욕구는 누구나 갖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 길이 막히고 시간이 오래 걸려도 차 속에서 직장인들은 하루를 구상하며 심리적 안정을 얻는다. 카풀이 좋다고 아무리 떠들어도 내 공간은 침해당하기 싫어한다. 자동차수가 늘수록 ‘나홀로 자동차’가 더 많아질 가능성이 높다. 부인과 자식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는 공간(골방 자동차)은 때로 직장인에게 활력소가 된다.
코쿤족은 △안정된 수입원을 갖고 있으면서 △업무능력이 뛰어나고 △스트레스 등 외부 자극에 대한 확실한 해결책(코쿤)을 갖고 있는 게 특징.
신한종합연구소 사회경제실 박영배팀장. “코쿤족은 ‘직장게임’에서 이기는 사람의 특징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러나 개인이나 가정을 중시하는 코쿤족이 늘어나면서 조직을 중시하는 전통적 가치관과 마찰을 빚을 가능성이 높다. 피할 수 없는 코쿤화경향이 전통적 가치와 어떻게 조화를 이뤄낼 지 두고 볼 일이다.”
〈나성엽기자〉news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