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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개혁 미룰수 없다①]정치자금 투명하게 밝혀라!

입력 | 1998-08-26 19:29:00


《정치개혁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체제와 수재로 고통을 겪고 있는 국민은 허송세월하면서도 세비만 챙기는 선량(選良)들에 대해 분노를 넘어 체념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정치권은 개혁의 목청만 높일 뿐 성과가 없다. 각 분야에서 변혁과 구조조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상황에서 정치권만 언제까지 ‘무풍지대’에 머물 것인가. 우리정치의 현주소와 정치개혁의 과제를 점검해본다.》

최근 한국부동산신탁의 경성그룹 특혜대출사건은 정치인들에 대한 로비의혹과 함께 정치자금문제를 부각시켰다.

경성측과 국민회의 정대철(鄭大哲)부총재간에 돈이 오간 과정이 정치자금 수수관행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경성측은 지난해 브로커인 이재학씨에게 5천만원을 주면서 “여러 사람을 동원해 도와달라”고 로비를 부탁했다. 이씨는 정부총재를 만나 “후원금으로 써달라”며 3천만원을 전달했다. 정부총재에게 경성얘기는 하지 않았다는 게 이씨의 주장. 검찰은 문제의 돈이 후원금이라는 이유로 정부총재를 조사하지 않았다.

청구그룹 비리사건에서도 검찰은 청구측이 한나라당의 중진과 광역단체장 등에게 거액을 준 사실을 밝혀냈으나 정치자금이라는 이유로 이들에 대한 소환조사는 물론 사건내용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국민회의 김영환(金榮煥)의원은 26일 국회 대정부질문을 통해 “여야를 막론하고 부정부패와 권력형 비리에 대해 엄정한 수사와 함께 수사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지난해 4월 한보비리수사에서 김수한(金守漢) 김덕룡(金德龍) 김정수(金正秀)의원 등 신한국당(현 한나라당)의원들이 한보에서 5천만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으나 역시 정치자금이라는 이유로 면죄부를 받았다.

이처럼 정치인들이 받은 돈은 뇌물이나 알선수재 공갈 등 범죄와 관련이 없으면 처벌되지 않는 게 관행이었다. 여기에는 검찰이 정치자금에 대한 수사에 소극적인 것도 한몫을 했다. 그러다보니 정치인들은 받은 돈이 문제가 될 것 같으면 정치자금이라고 핑계를 대기 일쑤였다.

96년 11월 대한안경사협회 로비사건도 이같은 맹점이 악용된 사례. 검찰수사에서 홍인길(洪仁吉)전의원이 95년 4·11총선직전 안경사협회에서 3천만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으나 후원금이라는 이유로 홍전의원은 소환조사를 받지 않았다. 당시 안경사협회는 안경사들이 렌즈뿐만 아니라 안경테도 독점판매할 수 있도록 의료기사법시행령 개정을 위해 로비에 혈안이 돼 있던 때였다.

지난해 정치자금법 개정으로 정치인이 선관위나 후원회를 거치지 않고 받은 돈은 처벌받게 됐으나 이 역시 음성적인 정치자금수수를 막는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뇌물이나 청탁성 자금이라도 해당의원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합법적으로 포장할 여지가 있는데다 검찰이 여전히 정치자금법 위반에 대한 수사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법개정 이후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처벌받은 정치인은 현재까지 한명도 없다.설사 정치인들이 대가성있는 돈을 받아 처벌되더라도 얼마되지 않아 사면복권되는 것도 검은 돈의 수수관행을 근절하기 어렵게 하고 있다.

14일 정부수립 50주년을 기념해 국민회의 권노갑(權魯甲), 한나라당 정재철(鄭在哲)전의원 등 한보관련 정치인들이 대거 사면 복권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 앨라배마주 오번대 유모교수는 “부패비리인사들이 죄값을 치르지 않고 특별사면됐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를 느꼈다”며 “정치인들에 의한 비리정치인들의 사면을 보면서 정치인은 모두 한통속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또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의 92년 대선자금과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비자금 등에 대한 검찰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점도 선거자금과 정치자금의 투명성을 확보하는데 제약요인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사법부의 선거사범에 대한 단죄의지가 약한 것도 문제다. 95년 4·11총선에서 선거법 위반혐의로 기소된 한나라당 이신행(李信行) 홍준표(洪準杓) 국민회의 이기문(李基文) 무소속 홍문종(洪文鐘)의원에 대한 재판이 선거후 2년이 지났는데도 계속 되고 있는 것이 단적인 사례다.

이석연(李石淵)변호사는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검찰이 정치자금법 위반에 대해 적극적인 수사를 해야 하며 비리의혹의 소지가 있는 정치자금은 포괄적인 뇌물죄를 적용해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차병직(車炳直)참여연대협동사무처장은 “정치자금의 투명성 확보를 위해서는 대통령과 검찰의 의지가 중요하다”며 “비리정치인에 대한 엄격한 법집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정치개혁이란 사실상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양기대기자〉k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