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인식〓무리한 경기부양책보다 구조조정을 우선해야 한다는 측은 우리 경제의 현상태를 ‘어렵지만 인위적으로 경기를 부양할 만큼 생산기반이 붕괴된 것은 아니다’고 본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이후 구조조정을 시작한 지 1년도 안돼 그 쓴 맛을 이기지 못하고 달콤한 부양책에 휩쓸리게 되면 어렵게 추진하고 있는 구조조정 작업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은행 김재천(金在天)정책기획부 부부장은 “경제가 새 출발할 기반까지 무너졌다면 앞뒤 가릴 것 없이 경기부양에 나서야겠지만 현상태는 그렇지 않다”고 진단했다. 한은은 최근 잠재성장에 관한 분석을 통해 ‘생산을 위한 물적 자본이 과거보다 줄지 않아 생산기반이 잠식됐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고 평가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관계자도 “올해 투자가 전년보다 50%정도 감소하더라도 이는 과잉투자와 부채비율이 해소되는 조정과정으로 봐야 한다”며 “국민의 높은 저축률이 투자로 연결될 수 있도록 금융시스템의 구조조정만 완료되면 성장세를 회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구조조정 우선론자들은 최근 일본에서 인플레이션 정책(물가상승을 감수하는 경기부양책)을 쓰자는 논의가 나오는 것은 장기불황에 대한 극약처방이라고 지적한다.
▼부작용과 대안〓인위적 경기부양에 신중한 쪽은 지금 상황에서 통화증발을 통한 경기부양책을 쓴다면 혜택이 재벌 대기업에만 돌아갈 것으로 본다. 결국 5대 재벌의 자금 독식 현상이 더욱 심해지고 이들이 호전된 자금사정을 등에 업고 구조조정에 더욱 거세게 저항할 것으로 우려한다.
박철(朴哲)한은 부총재보는 “어느 기업이 넘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돈을 풀어도 중소기업이 혜택을 받기는 어렵다”며 “돈을 풀기 전에 금융 기업 구조조정을 통해 신용경색을 해소하는 것이 순서”라고 말했다. 정부는 최근 실시한 신용보증기금 확충이 효력을 발휘하고 9월말로 예정된 정부의 은행출자를 통해 은행 구조조정이 일단락되면 신용경색이 어느 정도 풀릴 것으로 기대한다.
현오석(玄旿錫)재정경제부 정책국장은 “정부의 구조조정 방안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는지 지켜본 뒤에 통화확대 등 부양책을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철환(全哲煥)한은 총재는 26일 “금융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금융시장이 불안해지거나 추석 연말 등 자금수요가 늘 때는 돈을 신축적으로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영국계 은행 관계자는 “외국인들은 연초에 5조원 가까운 돈을 서울 증시에 투자했다가 구조조정이 지연돼 실망하고 있다”며 “한국이 본격적인 구조조정에 나서야 다시 투자를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용재기자〉yj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