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신분일수록 더 많은 책무를 진다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는 비단 영국에서만 통용될 말은 아닌 것 같다. 이른바 상류층에 대해 잘난 체하고 자기중심적이며 탐욕스럽고 부도덕하다는 부정적 시각이 보편화된 우리 사회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더욱 절실하다고 본다.
물론 권력과 명예, 금력을 가진 상류층 사람들의 사회적 성취는 남다른 창의와 근면 성실을 앞세워 땀흘려 일한 소중한 결실일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남보다 월등한 사회적 우대와 특권을 누리는 것은 형평에 맞지 않는다. 더구나 이들이 얻어낸 성취는 타인의 희생과 손해 위에서 이룩된 점이 없지 않다. 우리나라처럼 격동기에 변칙적 방식으로 신분상승을 이룬 졸부들이 대거 상류계층을 형성한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렇게 볼 때 지도층 사람들이 특혜만큼의 책무를 이행하고 상처입은 이웃을 위로하며 베푸는 일은 마땅히 해야 할 기본적인 도리다. 또한 이들의 사회적 영향력으로 보아 평균인보다 더 엄격한 윤리와 수범적 태도가 요구되는 것도 당연하다 할 것이다.
일본에서는 윗사람을 책임자라고 한다. 권한보다는 지도자의 엄격한 책무를 강조한 뜻일 것이다. 3백년전 도쿠가와(德川)시대에 영주였던 다이묘(大名)의 밥상은 일즙삼채(一汁三菜), 즉 국 한그릇에 반찬 세가지였다고 한다. 경제단체연합회장을 역임한 도코 도시오(土光敏夫)는 1년 수입이 1억엔 남짓임에도 월 15만엔만 생활비로 쓴다. 아침은 요구르트와 야채주스, 점심은 메밀, 저녁은 정어리 두마리에 된장국으로 식사를 끝내고 전차로 출퇴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래전 대장상을 지낸 와타나베 미치오(渡邊美智雄)의원이 15평 의원아파트에 기거하며 아침식사를 손수 차려 먹는 것을 TV로 본 기억이 새롭다. 이처럼 늘 모자라고 배고픈 듯한 ‘하라하치부(腹八分)’를 생활신조로 하는 일본 사회지도층의 근검 절제하는 생활은 국민의 사표가 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얼마전 상류층 자제들이 돈을 주고 군복무를 면한 사건으로 세인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한 일이 있다. 82년 영국의 앤드루왕자가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 전쟁 때 흔쾌히 전투기를 몰고 죽음의 전쟁터로 나간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부끄럽기 짝이 없다.
또 정치인 장관 등 높은 사람들이 기업인들과의 금품수수로 줄줄이 투옥된 민망한 모습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재벌회장이 거액의 돈을 해외에 빼돌리고 교수나 종교지도자가 부동산투기 외화밀반출 등에 연루돼 사회문제화된 적도 있다. 따지고 보면 상류층 사람들을 존중하기는커녕 헐뜯고 불신하고 비꼬는 냉소주의가 팽배한 것은 그들 스스로의 자업자득일 수 있다.
신분이 높고 영향력이 큰 사람일수록 사회의 소금과 빛이 되고 보다 나은 세상을 열어가는데 앞장서야 한다. 실직자와 결식 아동들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이재민들을 위해 먼저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 그래야 위 아래 일체감을 이루고 직장과 사회에서 갈등과 분열이 사라질 수 있다. 지금처럼 IMF위기로 모두가 고통스럽고 생활이 어려울수록 사회지도층이 솔선하여 할 일이 많을 것이다. 상류층이 더욱 헌신하는 ‘희생의 교대’를 통해 한국형 노블리스 오블리제 사회를 이루는 것이 위기탈출의 숨겨진 지름길일 것이다.
송인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