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수많은 해프닝과 일화를 남겼다.
외교적 상황에 맞지 않는 발언으로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들었는가 하면 담판을 벌이듯 정상회담을 이끌어 가기도 했다. 주장을 굽히지 않다가 실리도 챙기지 못한 채 명분마저 잃은 경우도 많았다는 게 외교가의 뒷얘기다. 이런 경우는 때때로 외교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임기중 8번의 정상회담과 15차례의 전화회담을 했던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과 얽힌 일화가 많다.
94년 11월14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정상회담이 열린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김대통령은 클린턴대통령과 만나 자신있는 표정으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역설했다.
“선거에서는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법입니다.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소야대 상황을 잘 이용하면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전혀 부담을 지지 않아도 될 겁니다. 앞으로 무슨 문제가 생기면 의회 때문이라고 떠넘기면 되지 않겠어요.”
김대통령이 민주당의 총선 패배로 여소야대 상황에 직면한 클린턴대통령을 위로하면서 ‘정치적 조언’을 한 것이다. 그러나 클린턴대통령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 말이 없었다.
그는 회담이 끝난 뒤 참모들에게 “김대통령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고 그 내용이 우리 외교관들에게 전해졌다.
김대통령은 95년 7월27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클린턴대통령에게 역공을 당했다. 클린턴대통령은 한국전 참전기념비 제막식 참석차 미국에 간 김대통령을 만나자마자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선거에서는 이길 수도 있고 질 때도 있는 법이죠”라고 운을 뗐다. 그는 이어 “여소야대가 되면 오히려 야당에 책임을 떠넘길 수 있지 않느냐”고 조크했다.
‘6·27’지방선거에서 여당인 민자당이 패배하는 바람에 정치적으로 위축돼 있던 김대통령에게 클린턴대통령이 바로 전해 인도네시아에서 받았던 말을 되돌려 준 것이다.
김대통령은 클린턴대통령과의 전화회담에서 반말을 하는 바람에 양국 외교가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북한 핵문제 협상에 관여했던 한 외교관의 증언.
“95년 봄 미국과 북한은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 대북 경수로 공급협상을 벌였습니다. 북한이 공급계약서에 ‘한국형 경수로’라고 명기하는 것을 꺼리자 미국측도 편법으로 표시하고 넘어가려 했지요. 이런 보고를 받은 김대통령이 클린턴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불만을 토로하며 격앙된 목소리로 ‘동맹국 사이에 이런 식으로 하면 우리도 경수로고 뭐고 다 없던 일로 할 수밖에 없다’고 반말투로 말했다는 거예요. 김대통령이 반말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미 양국간에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돼 북―미(北―美)협상에 결정적 차질이 빚어질 위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이런 해프닝이 자꾸 벌어지면서 클린턴대통령은 김대통령과 회담하는 것을 몹시 부담스러워했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특히 수십년간 야당정치인으로 활동하며 담판에 익숙해진 김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도 의전을 무시한 채 담판하듯 대화를 끌어가 클린턴대통령이 곤혹스러워 한 적도 많았다는 것.
93년 11월23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이 대표적인 경우. 이 회담에서 김대통령은 “팀스피리트훈련 중단 여부는 한국이 결정해 먼저 발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무진 사이에 이미 양국이 협의를 통해 팀스피리트훈련문제를 처리하기로 합의했으나 이를 완전히 무시한 것이었다.
클린턴대통령이 실무진의 합의대로 한미 양국이 공동발표하자고 요구했지만 김대통령은 막무가내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 실무자의 설명.
“김대통령이 클린턴대통령과 논란을 벌인 끝에 자기 뜻을 관철시키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별로 실리도 없는 문제에 매달리느라 예정시간을 훨씬 넘기게 됐고 클린턴대통령과의 신뢰에도 금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94년 인도네시아 APEC정상회담 때 ‘보고르선언’을 채택하는 과정에서도 외교적 실리보다는 국내 정치적 상황을 우선 고려하는 김대통령의 외교 자세가 그대로 드러났다.
당시 APEC정상회담의 최대 이슈는 회원국들의 무역자유화 일정을 담은 ‘보고르선언’채택 여부였다. 외무부 관리의 증언.
“주최국인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대통령은 선진국은 2010년까지, 개발도상국은 2020년까지 무역을 완전자유화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보고르선언 초안을 마련했습니다. 수하르토대통령은 회원국 전체 정상회담에 앞서 각국 정상들과 개별 회담을 통해 이 초안을 수용해 주도록 요청하는 과정에서 김대통령에게 한국은 ‘2010년 개방그룹’에 들어가달라고 주문했어요.
김대통령이 처음에는 수하르토대통령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처럼 얘기했어요. 그런데 수행했던 청와대 수석비서관 한 사람이 2010년 개방안을 받아들이면 국내에서 무역 조기자유화를 수용했다는 이유로 엄청난 공격을 받게 된다고 김대통령에게 조언했어요. 국내에서 파문이 예상된다는 수석비서관의 말을 듣자 김대통령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한국은 2020년 개방에 참여하겠다고 고집했어요.
인도네시아뿐만 아니라 다른 회원국들이 당황한 것은 물론이고 보고르선언 자체가 무산될 위기에 빠졌습니다. 결국 김대통령의 고집대로 한국은 2020년 개방그룹에 포함됐어요.
그러나 개방시기를 10년 연장했다고 해서 우리가 얻은 이익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APEC회원국들로부터 ‘문제아’라는 비난만 사게 됐어요.”
당시 정부는 선진국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추진중이었기 때문에 보고르선언의 개방시기와 상관없이 2000년대 초반에는 무역 완전자유화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평소 ‘절대’ ‘철저히’ ‘반드시’등 최상급 표현을 자주 쓰는 김대통령의 언어습관 때문에 정상회담에서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93년 11월6일 경주에서 열렸던 한일정상회담에서 있었던 일.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일본총리가 단독정상회담에서 김대통령의 민주화투쟁 경력과 과감한 개혁추진에 존경을 표시하면서 분위기를 띄웠어요. 호소카와총리는 이어 한국어선의 일본영해 불법조업 때문에 일본정부가 아주 곤란을 겪고 있다면서 불법조업을 근절시켜 달라고 주문했어요.
호소카와총리의 찬사에 들뜬 김대통령은 ‘국제사회에서도 불법은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불법조업을 근절시키겠다’고 단정적으로 말했어요. 한국측 통역이 이처럼 강하게 약속했다가 나중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해 ‘진상을 파악해 적절히 대처하겠다’는 선에서 통역했어요.
그러나 일본측 통역이 호소카와총리에게 한국측에서 의역했다고 귀띔하자 호소카와총리가 재차 다짐을 받았지요.”
김대통령이 ‘검토’‘적절한 조치’ 등 외교용어를 무시한 채 반드시 지킬 것처럼 약속하는 바람에 일본이 나중에 외교채널을 통해 약속불이행이라며 강하게 항의하기도 했다.
김대통령은 의전을 무시하고 엉뚱한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상대방을 곤혹스럽게 하기도 했다.
95년 11월19일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열린 APEC정상회담 때의 일. 18개국 정상들은 오사카성 영빈관 앞뜰에 앉아 일본식 다도(茶道)에 따라 차를 마셨다. 다른 정상들은 전통복장인 기모노를 입은 일본여성들의 안내에 따라 차를 마시며 사진기자들을 위해 포즈를 취했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수차례 권유에도 불구하고 차를 마시지 않다가 갑자기 막걸리 마시듯 단숨에 들이켰다.
일본측은 바로 전날 한일정상회담에서의 과거사 문제 논의에 대해 심기가 불편해진 김대통령이 항의의 뜻으로 차를 거부한 것으로 보고 곤혹스러워했다는 게 당시 행사에 참석했던 외교관의 전언이다.
김대통령은 그러나 이듬해인 96년 6월23일 제주에서 열린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일본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는 예정에도 없던 단독회담을 갖는등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 정상회담을 준비했던 외무부 관계자의 설명.
“하시모토총리가 공식만찬에서 김대통령에게 ‘선배’라고 부르며 깍듯이 대접했어요. 만찬이 끝날 때가 되자 표정이 상기된 김대통령은 ‘주변사람들을 물리치고 우리끼리 좀 더 얘기하자’고 제안했어요. 하시모토총리도 좋다고 응해 55분간 단독대좌를 했어요. 정상회담에서 예정에 없던 단독회담을 갖는 것은 중요한 담판사안이 있을 때 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중대한 결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를 걸었어요. 하지만 김대통령과 하시모토총리는 단독대좌에서 현안을 논의한 것이 아니라 서로 안부를 묻는 등 한담을 하는 데 그쳤습니다.”
바로 전해 정상회담에서 냉랭한 태도를 보였던 김대통령이 갑자기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자 일본 외교관들이 오히려 당황했다.
〈이동관·김차수기자〉dk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