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도 사회처럼 진화하고 퇴화하는 ‘유기체’. 어제의 물좋던 거리가 오늘의 썰렁한 거리가 돼 버리고 새로운 거리가 떠오른다. 거리마다 몰리는 세대와 계층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 최근 들어 주목받고 있는 거리와 그곳 사람들, 문화를 시리즈로 소개한다.》
‘바람부는 날에는 여피거리로 간다.’ 80년대 후반 잘 나가던 젊은이들의 ‘해방구’ 서울 압구정동. 90년대가 끝으로 치닫는 지금 압구정동의 옛주인공들은 그곳에 없다. 이들의 상당수가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다녀와 30대의 고소득 전문인이 됐다.
‘여피’(Yuppie:도시에 사는 젊은 전문직종사자)로 성장한 이들이 10,20대의 거리로 ‘전락’한 압구정동을 떠나 길건너 청담동에 자기들만의 공간을 만들어가고 있다.
▼ 거리의 형성
갤러리아명품관 학동사거리 청담동사거리를 꼭지점으로 하는 세모꼴의 거리. 행정구역은 서울 강남구 청담1동. 남서쪽으로 압구정동이 길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고 북서쪽은 ‘신로데오거리’라 불리는 패션가. 면적은 약 12만㎡. 40여개의 카페와 음식점, 10여개의 화랑이 들어서 있다.
압구정동과 맞닿은 큰길가를 제외하고 대부분 주택가였던 이곳에 카페와 음식점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97년초. 케이블TV m.net빌딩 뒷골목에 에스프레소커피전문점 ‘하루에’와 패션사진작가 김용호씨가 주인인 ‘카페 드 플로라’가 등장하면서부터.
김씨의 얘기. “원래 고급빌라 외국대사관 화랑이 들어서 있던 주택가다. 20대에 압구정동의 문화를 주도했던 사람들이 고학력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가 되어 돌아와 주택을 개조해 카페와 음식점을 차리거나 찾고 있다.”
건축물들은 개성있는 얼굴을 갖고 있다. 카페나 음식점의 인테리어는 화려한 원색보다 세련된 무채색과 파스텔컬러가 주조. 최근에는 연예인이 즐겨찾는 미용실이 속속 들어서 거리의 새로운 명물로 부상.
▼ 사람들
힙합바지를 입은 10대와 걸어다니는 연인들. 청담동에서 찾아볼 수 없는 두 부류다. 전형적인 ‘±30대 공간’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20대 후반∼40대 중반, 여자는 20대 중반∼40대 초반. 만만찮은 나이지만 나이대로 보기 힘든 패션개성파가 대부분. 무스를 바르고 선글라스를 낀 ‘샤프한’ 30대 남성, 소매없는 티셔츠의 30대 미시족.
‘여피거리’가 단골출입처인 안재만씨(29). “이 거리는 차분하다. 10대의 수런거림이나 북적거림이 없다. 카페며 음식점이며 하나하나 개성이 있다. 이곳에 앉아 있으면 뭔가 특별한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 든다.”
청담동 골목에는 걸어다니는 사람이 드물다. 한 카페에서 만난 정현미씨(33·주부·서초구 잠원동). “압구정동은 차를 대기가 불편하지만 청담동의 카페나 음식점은 모두 ‘발레파킹’(직원이 주차를 대신하는 것)을 해주기 때문에 편하다.”
▼ 문화
에스프레소커피 와인 재즈 퓨전푸드 시가. 여피거리의 ‘문화공식’이다. 압구정동 문화의 대표격이었던 헤이즐넛커피 외제맥주 양담배 등과는 분명한 단절. 왜일까?
퓨전푸드전문점 시안의 대표이자 카페 마고의 지배인인 이상민씨(28). “카페나 음식점을 낸 사람은 대부분 외국경험이 있는 전문직 종사자다. 압구정동 문화보다 한단계 세련된 문화를 경험하고 돌아온 이들은 이곳에 고급한 취향에 맞는 공간을 만들려 한다.”
고급 취향은 고가를 부른다. 커피값만 해도 ‘길건너’와 차이가 난다. 압구정동에서 4천원인 커피값이 이곳에서는 5천∼9천원. 와인은 2만5천∼10만원. 웬만한 요리가 1만∼3만원. 한쌍이 식사하면 10만원은 족히 쓴다. 한 카페의 지배인은 “이곳 사람들은 ‘비싼’분위기를 즐긴다.값싼 메뉴를 내놨다간 망하기 십상이다”고 귀띔.
20년째 압구정동에 사는 소설가 채지민씨(31). “80년대 후반 ‘운동권문화’를 거부하고 압구정동을 일궜던 이들이 더욱 개인주의적인 모습으로 성장해 자기들만의 폐쇄된 공간을 만들어가는 것 같다.”
##「여피거리」 특색있는 공간##
▼스케치 파스타 비스트로〓이탈리아식 파스타, 피자점. 8가지 면과 6가지 소스, 12가지 양념 중 선택해 ‘나만의 파스타’를 만들어 먹을 수 있다. 파스타와 피자 각 8천원. 와인 2만5천∼3만5천원. 영화음악가 송병준씨가 운영. 02―516―1581
▼시안〓퓨전푸드 전문점. 프랑스식을 기본으로 중식 일식의 조리법이 뒤섞인 30여가지 요리. 점심과 저녁에 양과 값에 차이. 1인당 2만∼4만원정도. 사천식쇠고기 광동식오리 왕새우와 시금치파스타 등이 대표메뉴. 와인 2만∼15만원. 02―512―1998
▼카페드플로라·살롱드플로라〓사진전이 늘 열리는 카페드플로라(1층)에서는 다즐링 아쌈 등 차와 에스프레소커피 5천5백∼7천원, 케이크는 조각당 4천5백원. 판토마임 등이 열리는 살롱드플로라(지하1층)에서는 외국산 와인 4만∼10만원. 쿠바산 시가는 한개에 1만5천∼2만7천원. 02―514―6336
▼라 띠에르〓바깥쪽은 지중해풍 노천카페, 안쪽은 심플한 인테리어의 카페. 박영숙씨의 도예작품 전시. 원두커피 허브티 홍차 4천5백∼6천원. 프랑스식 케이크와 쿠키의 맛이 일품. 오전 11∼오후11시. 02―547―5611
〈박중현기자〉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