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나 중학교 시절, 가장 재미 있게 읽은 소설 몇편 고르라고 한다면 대개 알렉산더 듀마의 ‘삼총사’나, 다니엘 데포의 ‘로빈슨 크루소’나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들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걸리버 여행기’를 파격적인 소재에 환상적인 모험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사춘기 소년 소녀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지금 생각하면 삭제판에 그것도 초록을 번역한 것이었지만 감수성이 한창 예민하던 때의 독서였던지라 나의 경우 ‘걸리버 여행기’는 세계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고전의 하나였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원명이 ‘레뮤엘 걸리버에 의한 먼 몇 나라에로의 여행’인 이 ‘걸리버 여행기’는 구상 단계에서부터 15년, 실제 집필 5년이라는 세월을 거쳐 1726년 ‘걸리버의 사촌 심프슨’이라는 이름으로 런던에서 출판되었다. 이처럼 스위프트가 이 책의 발간에 굳이 가명을 사용했던 것은 두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믿기 힘든 이 소설의 이야기들에 사실성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저자를 주인공의 사촌으로 함으로써 마치 실제 겪은 일을 기록한 것처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정치적인 탄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인데 이야말로 ‘걸리버 여행기’의 본질에 관련된 것이다. 사실 스위프트는 보편적으로는 인간의 내부에 자리한 동물적 본성을, 현실적으로는 당시 앤여왕 치하에서 휘그당과 토리당의 갈등이 빚어낸 부도덕한 정치 사회 상황을 풍자하려는 목적으로 이 소설을 썼다. 스위프트는 실제의 당시 정치세력들의 탄압을 받고 심지어는 정신병자로까지 몰리게 되는 상황에 처해진다. ‘걸리버 여행기’역시 그 내용에 있어서 정치 및 사회 풍자에 관련된 부분은 삭제되고 그 대신 단순한 환상적 모험담으로 개작되어 오랫동안 저자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아동용 도서로 취급되었다. 영국의 초기 자본주의 형성에서 빚어진 인간성의 타락과 정치적 비리를 폭로, 풍자한 ‘걸리버 여행기’ 가 90년대를 사는 한국인에게도 삶의 거울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걸리버 여행기’를 읽으면 우리는 거기에서 소위 IMF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정치 상황과 자화상을 보고 새삼 깨닫는 점이 있을 것이다.
오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