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탑서 내려다본 평양
《본사 방북대표단은 8월27일부터 9월5일까지 9박10일 동안 평양, 양강도 삼지연군, 백두산, 평안북도 향산군 등을 방문해 취재활동을 벌였다. 방북기간중 찾았던 북한사회 곳곳의 생활상과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표단 일원으로 동행했던 소설가 이호철씨가 5회에 걸쳐 연재한다》
8월27일 오후 7시가 넘어서야 평양시내 ‘보통강 여관’으로 들어섰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으로는 보통강 호텔.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천장이 엄청나게 높고 우람하고 그리고 넓다. 소련을 비롯한 구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던 건축양식.
조금 스산한 느낌을 떨치지 못한 채 705호실을 찾아 엘리베이터를 탄다. 열쇠로 문을 따고 거실 안으로 들어서며 휘휘 둘러보는데, 공항까지 마중나왔던 훤칠하고 잘 생긴 감색 신사복차림의 안내원이 창쪽 에어컨 앞으로 가며 말했다.
“조금 덥구만. 냉방기를 트십시다”하고는 스위치를 올리자 대번에 찬 바람이 ‘쏴아’ 쏟아져 나온다. 나도 거의 무심결에 즉각 “까짓 좀 덥지요 뭐. 전기도 아껴드려야 헐 것이잉까”하며 스위치를 도로 내렸다.
일순, 묘한 침묵이 피차에 잠깐 흘렀다. 무심결에 즉답으로 나온 말이었는데, 혹여 내 말을 비아냥거리는 쪽으로 받아들이지나 않았을까.
하지만 그랬을 리야. 하늘을 우러러 나는 참으로 진정이었으니까.
옆의 침실로 들어섰다. 천장이 휘영청하게 높았다. 호텔 접대원 아주머니가 앞으로 쑥 나서며 모기 쫓는 기구 쓰는 법을 가르쳐준다. 나는 또 즉각 받았다.
“까짓 모기도 좀 물리지요 뭐. 모기도 그렇게 50년만에 고향에 온 저를 반갑다고….”
또 잠시 묘한 침묵. 드디어 큰 가방을 든 중년 안내원이 들어와 말했다.
“문은 이렇게 이중문으로 되어 있으니까 닫아 놓으면 그 누구도 들여다 보질 못합니다.”
나는 그말이 떨어지자 마자 또다시 즉각 받았다. “들여다본들 뭐 어떻습니까. 까짓 두 문 다아 활짝 열어 놓으세요.”
말해놓고 보니, 비아냥거리는 쪽으로 받아들이자면 너끈히 그럴 수도 있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원체 나는 즉각즉각 받으며 기탄이라곤 없었고 처음부터 마음을 타악 열고 있었던 것이다. 또다시 묘한 침묵.
그러나 9박10일간의 북한 체재 기간 중의 이 첫 대화는 후한 점수를 받았던 것같다. 그건 틀림없었다. 열흘 뒤, 베이징(北京)공항에 닿으면서 나는 체북(滯北) 첫날 호텔에서의 이 대화를 반추하며 이 점을 새삼스레 확인했다.
북한 체류기간중 내 머릿속에 첫 인상으로 깊이 꼬나박혀 들어왔던 것은 우선은 접대원 아주머니들이었다.
남쪽 우리네 40,50년대에는 온 나라에 지천으로 널려있다시피 많았고, 60년대 70년대까지도 맥을 이어왔던 우리네원(原)조선여성상, 한국 여성상이 이곳에는 고스란히 온존해 있었다. 푸근함 공손함 절제 예의바름 성실 짜디짠 살림꾸리기, 그런 미덕들이 두루두루 모아진 기본 품격. 발랑 까지지 않은 깊숙하고 넉넉한 우리네 재래의 여성 상(像).
그렇다. 앞으로 남북간의 바람직한 길도 모름지기 여기에 귀일될 것이다. 서로간에 따뜻한 것, 진정으로 살갗에 와 닿는 것들을 제각기 귀하게 여기며 조심스럽게 가꾸고 키워 가는 것, 거창한 소리 어려운 소리들일랑 일단은 미뤄놓고, 누구나가 알 수 있는 쉬운 것 부터 찾아 진정으로 공을 들이고 정성을 들여가는 것. 남북 간에 우선 피를 통하게 하는 일….
평양은 녹지공간과 대형건축물이 나름대로 조화를 이룬 도시였다.
82년 김일성(金日成)주석의 70회 생일 기념으로 세운 물경 1백70m 높이의 주체탑은 높고 우람했다. 20m높이의 45t짜리 끝머리 횃불을 올리는 데서 새로운 공법을 발명해내 과학 기술에서 노벨상과 맞먹는 스위스의 위퍼상을 타기도 했다는 게 안내원의 설명. 김일성주석의 70회 생일을 날수로 계산, 2만5천5백50개의 돌을 70단으로 쌓아 만들어진 것이란 설명에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82년 건설된 높이 60m의 개선문. 그 건너편 김일성 경기장앞은 북한정권 수립기념일인 9·9절 경축행사를 앞두고 예행연습을 벌이는 학생들로 연일 북적댔다.
김일성주석의 생가인 만경대며 거대한 김주석 동상이 서있는 만수대, 그리고 대성산의 혁명열사릉이며 혁명열사기념관. 그 가는 곳마다 해설원 아주머니들의 정성과 열정이 담긴 해설은 판에 박은 듯 같은 소리이긴 했지만 60대 중반으로 들어서 50년만에 이북땅에 발을 디딘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쪽에서 하고 싶은 소리야 없었을 리 없지만, 아서라 아서, 억눌러 참는 것이 손님으로서의 기본 예의요 도리일 것이다. 대소사를 막론하고 어찌 하고 싶은 소리 죄다 하면서 살겠는가.
이번 여정에서 나는 어느 누구보다도 활기차게 즐겁게 노상 웃었다. 체통머리가 조금 떨어질 정도로, 더러는 주책없어 보일 정도로 웃을 일만 찾아서 허발을 하고 달려들었다.
지금 돌아와서 생각해 본 즉 바로 그것이 나름대로 효과를 본 듯 하다. 우리를 안내하는 그이들은 그이들대로 편하고 우리 일행도 일행대로 양껏 즐거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진정으로 친구가 되었다. 헤어지면서 서로 눈물을 질금거리기도 했으니까.
모름지기 남북간의 새 길은 이런 식으로 이렇게 첫 가닥이 잡혀야 할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얻은 것만 해도 이번 여정의 큰 수확이었다.
이호철(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