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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話 문민정부 74]황병태대사「美-中 균형접근론」파동

입력 | 1998-09-07 19:33:00


94년 3월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중국 방문 막바지에 터져나온 ‘황병태(黃秉泰)발언 파동’은 문민외교비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황 주중(駐中)대사의 발언 요지는 대미(對美) 대일(對日) 편중 일변도의 외교전략을 수정하거나 적어도 대북(對北)정책에 관한 한 중국의 역할을 미국 못지않게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황대사의 발언에 대해서는 ‘자기 현시욕’이 강한 황대사의 촌극(寸劇)쯤으로 치부해 버린 시각도 없지 않았다.

또 정치권에서는 오락가락하는 문민외교의 상징처럼 공세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하지만 ‘황병태 발언’은 오늘날 한반도 평화구축의 중심구상으로 진행되고 있는 남북한 및 미중(美中)의 4자회담에까지 이어지는 의미있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대통령이 장쩌민(江澤民)중국국가주석과 한중(韓中)정상회담을 가진 다음날인 94년 3월29일 밤10시경 베이징(北京)의 상그리라호텔.

몇몇 방송기자들로부터 한중 정상회담의 성과에 대한 코멘트를 요청받은 황대사가 호텔 2층 프레스센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부터는 한국과 미국, 그리고 중국이 처음부터 함께 북한 핵문제를 논의하게 됐습니다. 북한 핵문제에 관한 한중간의 논의는 과거 한미간에 구체적인 협의를 끝낸 뒤 중국측에 이를 통보하고 협조를 구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이제는 중국과도 처음부터 같이 논의하고 같이 행동해 나가기로 했습니다. 우리 외교도 대미, 대일 일변도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중국이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적극적인 역할을 하기로 했습니다.”

황대사의 발언에 기자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92년 한중 수교 이후 양국간 교류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었고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중국을 미국에 버금가는 정치적 파트너로 삼아야 한다는 발언은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날 김대통령은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한승주(韓昇洲)외무장관을 미국으로 급파해 놓은 상황이었다.

황대사의 발언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현장에 있던 일본의 한 통신사 기자가 “김대통령은 일본 방문 때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총리와 정상회담을 하면서 한국 미국 일본 세나라가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긴밀히 협의하고 공동 대응해 나가겠다고 했는데 그럼 일본의 역할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황대사는 “일본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다”고 한마디로 잘라버렸다.

황대사의 발언은 박영환(朴榮煥)청와대 공보비서관을 통해 즉각 김대통령의 숙소인 댜오위타이(釣魚臺)에 있던 정종욱(鄭鍾旭)청와대 외교안보 수석비서관에게 전달됐다. 걷잡을 수 없는 소동이 벌어지고 말았다.

정수석은 대사관을 통해 황대사를 긴급수배한 뒤 “당신이 대사면 대사지 무슨 자격으로 그런 얘기를 하는거요. 빨리 프레스센터로 가서 해결하든지 책임을 지든지 하시오”라고 몰아붙였다.

밤 11시30분 쯤 다시 프레스센터에 나타난 황대사가 “대통령도 중국에 계시고 또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를 요청해야 할 내용도 있는 것 같다”고 해명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상태였다.

급기야 새벽 1시 쯤 정수석이 납덩이같은 얼굴을 한 채 황대사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황대사는 중국 정부의 기대를 전한 것에 불과하며 우리 정부가 한미 공조체제와 같은 수준으로 중국과 협의한다는 얘기는 전혀 거론된 적이 없다. 황대사가 실수를 했다.”

면전에서 이런 수모가 없었다. 황대사는 나중에 “후배나 마찬가지인 정수석으로부터 일생일대의 수모를 당했다”고 토로했다.

파문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확산돼 나갔다.

야당인 민주당의 이기택(李基澤)대표는 외교안보팀 전원의 교체를 주장했고 여당인 민자당조차 “외교 안보팀에 문제가 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정작 김대통령은 그리 격노(激怒)하지 않았다. 김대통령의 평소 성정(性情)으로 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속사정을 알고보면 이해못할 일도 아니었다. 사실 김대통령은 이미 황대사로부터 미국 일변도의 외교에서 탈피해 적어도 남북관계에 관한 한 중국을 미국 만큼 중시해야 한다는 건의를 ‘입력’받고 있었던 것이다.

장쩌민주석과의 정상회담 하루 전인 3월27일 밤 중국 영빈관인 댜오위타이의 김대통령 숙소.

김대통령과 단둘이 마주한 황대사는 북한 핵문제와 중국의 역할이 중요함을 단언하다시피 역설했다.

“각하, 남북한이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가 이를 보장한다는 ‘2+4회담’은 의미가 없습니다. 각하, 북한을 움직일 수 있는 나라는 중국밖에 없습니다. 일본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그리고 러시아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러니 중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도록 해야 합니다. ‘2+4’가 아니라 ‘2+2’, 즉 남북한과 중국 미국 등 4자가 한반도 평화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김대통령은 황대사의 역설에 “그래, 일본이 무슨 힘이 있고 러시아가 무슨 관계야…”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대통령은 이미 이 때부터 2년 뒤인 96년 4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의 제주 정상회담에서 합의, 발표한 ‘한반도 평화를 위한 4자회담’의 구상을 ‘입력’받고 있었던 셈이다.

황전대사는 자신의 ‘베이징 발언’을 둘러싼 파동을 “한반도 평화회담의 축을 ‘2+4’에서 ‘2+2’, 즉 4자회담으로 정리해 나가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었다”고 털어놨다.여하튼 “김대통령이 황대사를 크게 질책했을 것”이라는 청와대 관계자들의 ‘언론 플레이’와는 달리 김대통령은 황대사를 질책하지 않았다.

귀국 후에도 파문은 계속 확산됐고 황대사를 소환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많았지만 김대통령은 오히려 얼마 후 경제장관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방법은 좀 잘못됐지만 현지 대사로서 나름대로 그런 입장을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두둔하기까지 했다.

사실 김대통령은 황대사 발언파동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김대통령의 40년 지기(知己)이자 문민정부 시절 베일에 가려졌던 ‘주요인물’인 김윤도(金允燾)변호사의 기억.

“김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기 며칠 전 황대사가 나를 찾아왔더군요. ‘미중 등거리 외교’를 한참 얘기했습니다. 김대통령한테도 건의했다는 겁니다. 내가 발끈했습니다. 어떻게 미국과 중국의 정치적 비중이 같을 수 있느냐. 미국은 그래도 우리의 혈맹이다. 중국과 경제교류를 확대하는 건 몰라도 정치적 유대는 안된다고 나무랐습니다.”

김변호사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김변호사는 김대통령과 허물없이 만나고 통화할 수 있는 ‘대통령의 친구’중 가장 보수적인 성향의 인물.

초대 비서실장을 지낸 한나라당 박관용(朴寬用)의원은 “김대통령이 ‘내가 아는 보수주의자가 그러는데…’라고 얘기하면 그건 바로 김변호사를 지칭하는 것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김변호사는 급기야 김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기 전에 세번이나 청와대로 전화를 걸어 “김대통령, 중국에 가서 절대 ‘미중 등거리 외교’라는 표현을 쓰면 안됩니다”라고 다짐을 받기까지 했다.

그런데 결국 황대사가 ‘사고’를 쳤다는 게 김변호사의 생각이었다.

김대통령은 중국에서 귀국한 날 저녁 김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변호사〓김대통령, 내 말을 들어줘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황병태, 그 친구가….

김대통령〓(김변호사가 계속 흥분하자)황대사가 그런 기자회견을 한 줄은 나도 몰랐어요. 대사로 가면 다 그 나라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겠어요.

황대사는 그러나 문민정부 출범 후 초대 주중대사로 임명됐을 때부터 ‘미중 균형접근’을 주장했다. 경북 예천에서 15대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96년 1월 대사 자리를 물러날 때까지 ‘균형접근론’을 역설했다.그는 “내가 주장한 균형접근론은 미일중심의 외교전략 전반을 바꾸자는 얘기가 아니라 대북정책에 관한 한 미국과 중국을 ‘동등한 파트너’로 생각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황대사의 ‘베이징 발언’은 단순한 촌극이 아니었다.

〈김창혁기자〉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