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균형외교’를 놓고 충돌 일보 직전까지 간 황병태(黃秉泰)주중대사와 후임자로 임명된 정종욱(鄭鍾旭)청와대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은 여러가지 면에서 대조적이었다.
초대 노재원(盧載源)주중대사가 문민정부가 출범한 93년 3월까지 잠시 대사직을 맡긴 했지만 문민정부 5년 동안의 한중 관계는 황, 정 두 대사가 이끌었다.
황전대사는 조건이 좋았다.
92년 8월 수교 이후 한중 관계의 새 틀을 짜는 시기에 대사를 맡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하던 중국 지도부는 황대사가 고(故)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신임 아래 경제기획원에서 쌓아온 70년대 개발시대의 노하우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특히 중국 경제부처 장관들이 황대사의 조언을 구하는 일이 많았다. 황대사가 인민대회당에서 장관들에게 개발특강을 하기도 했다.
당시 주중대사관에 근무한 외교통상부 간부는 “일본대사도 중국정부로부터 황대사 만큼의 대접을 받지 못했다”며 “황대사는 미국대사에 버금가는 위치를 누리며 공격적인 외교활동을 벌였다”고 기억했다.
심지어 장쩌민(江澤民)국가주석은 황대사가 이임할 때 환송연까지 열어주며 황대사에게 “중국정부의 ‘평생초청권’을 주겠다”고 했을 정도였다. 장주석의 환송연도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외교안보수석으로 있다가 황대사가 96년 4월 15대 총선에 출마하면서 대사직을 이어받은 정대사는 전임자와 달리 비교적 ‘방어적 외교활동’에 치중했다는 평이다.
서울대교수 출신으로 ‘신(新)중국론’ ‘마오이즘(모택동주의)과 개발’이라는 저서를 냈을 정도로 중국문제전문가로 알려져 있었지만 중국은 이미 변화의 와중에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