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정기국회는 여당과 무소속 의원들만의 반쪽 개회식으로 1백일 회기를 시작했다. 한나라당은 ‘야당파괴 저지를 위한 결연한 의지’를 내세우며 개회식에 불참했다.
이회창(李會昌)총재는 정치권 사정(司正)이 불공정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런 상황에서 국회를 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국회불참의사를 분명히 했다. 게다가 한나라당은 국회참석 조건으로 ‘대선자금 수사 중단’ ‘의원빼가기 중단’ ‘책임자 사과’를 여당측에 요구했다. 한나라당의 국회거부는 장기화할 조짐이다.
한나라당의 강경기류는 사정과 의원 연쇄이탈에 따른 피해의식에서 연유한 것같다. 그러나 그것이 국회거부의 명분이 될 수는 없다. 사정이나 정계개편과는 별도로 국회는 국회대로 굴러가야 한다. 대선자금이건 ‘표적사정’이건 따질 것이 있으면 국회에 들어가 따져야 한다.
더구나 한나라당은 비회기(非會期)에도 임시국회를 잇따라 소집했던 처지다. 그런 한나라당이 정기국회에 불참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것은 국회를 오로지 수사대상의원 피난처로만 삼겠다는 발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총재는 특히 국세청 대선자금 모금사건 수사에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이 사건은 국세청 간부들이 징세권을 왜곡한 중대문제로 국민의 공분을 낳고 있다. 이에 대한 수사를 ‘야당파괴’라고 규정하며 소환에도 불응하는 것은 국민의 지지를 받기 어렵다.
이총재의 말처럼 자신이나 당이 압력을 넣어 모금한 일이 없다면 서상목(徐相穆)의원이 당당히 검찰에 나가 그렇게 밝히면 될 것이다. 이총재는 특별검사제를 요구했지만 그 또한 국회에 들어가 논의할 사안이다. 특검제 도입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이총재의 요구는 시간벌기라는 오해를 살 수 있다.
지금 나라 안팎의 형편은 급박하다. 대외적으로는 세계경제의 불투명성과 북한관련 정세의 유동성이 증폭되고 있다. 대내적으로는 경제구조조정이 삐걱거리고 민생불안이 가중되고 있다. 그런 때에 내년도 예산안과 시급한 2백70여개 법안을 처리해야 할 정기국회가 공전한다면 국가적 불행이다.
그동안 ‘식물국회’나 ‘뇌사국회’의 오명(汚名)까지 얻은 국회가 또 표류한다면 정치권은 국민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 국회나 국가현안이 정쟁의 볼모가 될 수는 없다.
정기국회는 즉각 정상화돼야 한다. 여권은 사정에 간여하는 듯한 언동을 삼가고 의원 추가영입을 자제하면서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 사법당국은 수사의 공정성을 국민이 믿을 수 있도록 가시적으로 노력해야 옳다. 한나라당은 이런저런 조건을 걸지말고 국회에 들어가야 한다.
“개회식 불참과 등원거부는 다르다”는 이총재 발언과 서의원의 정책위의장 사퇴가 돌파구로 작용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