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제과 이모차장(39). 최근 실적보고회에서 발표 도중 호흡곤란과 말더듬 증상이 나타나 병원을 찾았다. “그, 그 순간 모두가 저를 싸늘한 시선으로 쏘아봤습니다. ‘이겨낼 수 있다’고 속으로 되뇌어 봤지만 소용이 없었죠. 그 순간부터 자존심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최근 신상에 무슨 변화가 있었나요?”
“구조조정 과정에서 부하직원이 하나도 없는 ‘사고 거래처’ 담당이 됐습니다. 한때 잘나가던 영업본부장이었다가 돈을 떼먹고 도망간 사람만 쫓아다니다보니 심한 모멸감을 느꼈어요. 꾹 참고 6개월을 버텨왔는데 결국 호흡곤란 증세가 나타나더군요.”
IMF시대에 처절한 ‘살아남기 투쟁’을 벌이고 있는 회사원들. ‘쓸개 빠진 사람’처럼 자존심은 일단 접어둬야 산다고 생각하기 쉽다. 후배를 팀장으로 모시며 신입사원과 영업실적 경쟁을 벌여야 하는 시대에 ‘자존심 운운’은 사치?
▼ 자존심의 위기 ▼
서울대 신경정신과 류인균교수는 미국의 심리학자 로젠버그가 개발한 ‘자존심 척도’를 이용해 임상실험을 해왔다. 지난해 8월 1백명의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 긍정적 평가는 +2.7점, 부정적 평가는 ―2.3점으로 합산한 자존심 지수는 +0.4였다. 그러나 최근 직장인 1백20명을 조사한 결과 긍정적 평가가 +1.9점에 불과. 전체 자존심 지수는 ―1로 ‘자존심 경보’ 수준.
▼ 마지막 자존심은 무엇? ▼
외국 합작기업에서 자료번역을 담당하던 박모씨(32). 최근 이 회사가 외국기업과 결별하면서 부서자체가 없어졌다. 서류정리와 복사같은 단순업무를 맡게된 박씨. “출근자체가 고통입니다. 입사 후배가 기획한 서류를 복사하는 내모습에 모멸감이 듭니다.”
S기업 정모대리(31). 3월 정리해고 과정에서 ‘살생부’ 중 ‘살부’에 오른 것으로 알려져 아내에게 “미안해. 이번에 포함된 것 같아”고 통고까지 했다가 막판에 구제됐다. “‘운이 좋았어’라는 부장의 말에 한순간은 안심했다. 하지만 ‘구겨진’ 자존심은 회복되지 않았다.”
▼ 추락과 부활 ▼
‘정글의 법칙’이 득세하는 시대. 자존심 추락의 끝은 어딜까. 백제병원 신경정신과 양창순과장.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 시대에는 자존심이나 자기실현 욕구에 의해 행동할 수 없게 된다. 신체적 위협을 제외하고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자존심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 자신과 가족을 보호할 수만 있다면 밖에서의 자존심은 모두 버리게 된다.”
바닥을 드러내는 자존심의 수준. 고려대 행동과학연구소 박동건교수. “체면이나 위신 같은 ‘소극적 자존심’보다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알리는 ‘적극적 자존심’이 필요한 시대다. 특히 연공서열이 사라지는 연봉제사회에서 적극적 자존심은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는 중요한 무기가 된다.”
〈전승훈기자〉raphy@donga.com
◇ 당신의 자존심 점수는? ◇
-美학자 로젠버그 측정법 제시-
▼긍정적 평가(‘그렇다’는 항목에 +1점)
△나는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적어도 다른 사람과 동등한 정도다.
△나에게는 좋은 점도 많다고 생각한다.
△나는 일을 다른 사람 만큼은 잘 할 수 있다.
△자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전체적으로 나는 자신에게 만족한다.
▼부정적 평가 (‘그렇다’는 항목에 ―1점)
△나는 자꾸 인생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자랑할 것이 별로 없다.
△나 자신의 가치를 더 느꼈으면 좋겠다.
△내가 가끔 쓸모없는 사람인 것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다.
※각 문항의 점수를 합산해 +2점 이상이면 자존심이 강한 경우, 0또는 1점이면 자존심이 약화된 경우, ―1점 이하면 열등감이 심한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