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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話 문민정부 75]공로명외무 중도하차

입력 | 1998-09-14 19:27:00


96년 11월5일 공로명(孔魯明)외무부장관이 갑자기 사표를 내고 병원에 입원했다.

공장관의 사퇴 소식이 전해지자 온갖 소문이 무성했다. 건강 때문에 사표를 냈다, 청와대 안기부와의 갈등으로 밀려났다, 인민군 전력 때문이다, 인사비리가 포착돼 물러났다는 등 온갖 설이 난무해 종잡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공장관의 사퇴는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즉흥적인 인사스타일과 부처간 갈등의 실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공장관을 사퇴로 몰고간 사건의 발단은 안기부의 ‘특상보고’. 권영해(權寧海)안기부장은 96년10월 중순 공장관의 신상에 관한 중요내용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국민회의가 공장관의 인민군 전력을 문제삼아 대대적인 공세를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권부장은 특히 잘못 대처했다가는 큰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김대통령에게 강조했다.

그러나 이 때까지만 해도 김대통령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게 주변사람들의 전언이다. 공장관의 인민군 전력은 이미 언론에도 보도됐고 사실상 검증을 거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안기부의 공격과 국민회의의 공세 움직임을 눈치챈 공장관이 사표를 제출하고 국군통합병원에 입원한 뒤 몇시간 동안 상황은 급변했다.

공장관의 사표 제출과정은 당시 이수성(李壽成)총리가 국회 답변을 통해 자세히 밝혔다.

“토요일(11월2일) 밤 9시10분경 공장관이 총리공관으로 찾아와 건강이 나빠서 도저히 장관직을 수행할 수 없다면서 사표를 냈습니다. 저는 공장관이 여러가지 업적을 낳았는데 왜 그러시느냐고 만류했습니다. 그런데 공장관은 육체적으로도 피곤하고 정신적으로도 피곤하다고 얘기했어요. 왜 정신적으로 피곤하냐고 물었더니 공장관은 중학교 때 의용군을 한 적이 있는데 일부에서 그것을 문제삼고 있고 언론도 재론하려고 해서 피곤하다고 대답했어요. 그렇지만 저는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고 말하고 사표를 반려했어요. 그리고 나서 화요일(11월5일) 제가 울산과 대구에 출장을 갔었는데 공장관이 총리실을 통해 사표를 다시 제출, 결국 처리됐습니다.”

공장관이 이총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표를 제출한 것은 김대통령의 의중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공장관은 김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김기수(金基洙)전대통령 수행실장의 설명.

“김대통령은 공장관을 무척 좋아하고 신임했습니다. 업무보고를 받은 뒤에 보통 한두시간씩 정국 전반에 관해 의견을 나누거나 한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안기부가 흔들어대는 상황에서 장관직을 제대로 수행하기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공장관은 그래서 사표를 제출해 대통령의 재신임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김대통령은 공장관이 사표를 제출했다는 보고를 받고 곧 반려했다. 김광일(金光一)대통령비서실장은 병원에 입원중인 공장관에게 사표 반려 사실을 통보했다.

그러나 사표 반려 사실이 알려지자 안기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기부가 이른바 ‘공로명파일’을 흘리면서 외무장관을 경질해야 한다고 재차 건의했던 것이다.

당시 청와대 고위 관계자의 증언.

“문제의 파일에는 공장관이 인사비리에 연루됐다는 투서와 재외공관에서의 예산 불법전용 등의 내용및 공장관이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공공연히 비판한다는 내용까지 두루 포함돼 있었습니다. 안기부는 공장관이 사표를 내고 병원에 입원했다는 사실을 언론에 흘려 사표제출을 기정사실화하기도 했습니다.”

외무부 관계자의 설명도 비슷하다.

“공장관이 사표낸 사실은 외무부에서도 차관 등 극히 일부만 알 정도였어요. 그런데 오후 늦게 사표제출 사실이 언론에 알려졌어요. 어떻게 언론에 알려졌는지 추적해보니 안기부에서 흘러나왔더군요.”

일단 사표를 반려했던 김대통령도 안기부의 진언이 계속되는데다 조간신문 가판에 공장관의 사표제출 사실이 보도되자 사표를 수리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다.

당시 청와대 수석 비서관의 설명.

“김대통령은 공장관의 사표제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갑자기 마음을 바꿔 사표를 수리하려고 했습니다. 인민군 전력은 이미 알려진 것인데 공장관을 바꿀 필요가 있느냐고 건의했지만 김대통령은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여서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윤여준(尹汝雋)청와대공보수석비서관은 11월5일 오후 7시40분경 공장관의 사표가 수리됐음을 공식발표했다.

김대통령이 사표수리쪽으로 마음을 바꾼 데는 유종하(柳宗夏)외교안보수석비서관의 발언도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청와대수석비서관의 이어지는 증언.

“김대통령은 공장관에 관한 안기부 보고를 받고 유수석에게 재차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유수석 역시 공장관의 인민군 전력이 이미 검증을 거친 사안이라는 사실을 보고하거나 공장관을 변호하지 않은 것으로알고있어요. 김대통령으로서도 마음이흔들리지 않을 수없게된 겁니다.”

국민회의의 이양호(李養鎬)장관 수뢰사건 폭로로 10월17일 이장관을 경질했던 김대통령은 공장관 문제가 다시 공론화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던 것.

김대통령은 국민회의의 연이은 장관 비리 폭로 움직임이 자신을 흔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권부장이 김대통령의 이같은 심리상태를 교묘하게 이용했다는것.

그렇다면 공장관이 안기부와 갈등을 빚은 근본원인은 무엇일까. 재외공관 최고책임자인 대사가 소속된 외무부와 주재관을 내보내는 안기부는 항상 갈등을 빚어왔다.

안기부 주재관이 안기부에서 직접 훈령을 받는데다 인사권도 안기부가 갖고 있기 때문에 대사의 통제를 제대로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안기부 주재관들은 대사나 외교관의 비리 등을 안기부에 보고해 문제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일반적 갈등보다는 공장관과 권부장이 대북정책을 놓고 자존심을 건 싸움을 했다고 관계자들은 설명했다.

96년9월 북한의 동해안 잠수함 침투사건이 터진 뒤 한미 양국이 대북정책을 놓고 갈등을 빚으면서 두사람도 갈등의 늪에 휘말리게 됐다는 것.

유수석도 공장관이 갑자기 경질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한미 갈등을 둘러싼 외무부와 안기부의 부처간 이견 때문이라고 증언했다.

당시 한미 양국간 의견조율에 참여했던 정부 고위관리의 회고.

“잠수함사건이 터진 뒤 안기부가 대북 강경론을 주도해 나갔습니다. 핵문제 해결 과정에서 외무부에 주도권을 빼앗겼다고 생각했던 안기부는 잠수함사건을 계기로 대북정책의 주도권을 회복하려 했어요. 김대통령이 북한의 사과가 없는 한 4자회담 진전이나 대북 경제원조를 하지 않겠다고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게 된 데는 안기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어요. 반면에 미국은 북한의 핵동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북한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당연히 한미 양국 사이에 이견이 생길 수밖에 없게 됐지요. 공장관은 이 와중에서 한반도에서의 긴장고조를 막기 위해서는 미국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래서 권부장과 공장관 사이에 마찰이 격화됐다고 봅니다.”

특히 국내의 한 일간지에 10월 중순 ‘북한이 추가 도발할 경우 한국군이 보복공격을 하기 위해 북한의 주요시설 12곳을 목표로 설정해 놓고 있다’는 보도가 나간 뒤 한미간 갈등은 더욱 증폭됐다.

전시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는 미국은 한국정부가 대북보복공격을 할 경우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한다는 점에서 강한 우려를 표명했다. 미국은이어 미국과의 사전협의없이는 북한에 대한 보복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국정부에 요구했다.

이 와중에서 권부장은 공장관이 미국 편을 들어 김대통령을 자기 편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공장관의 인민군 전력을 문제삼아 결국 공장관이 사표를 제출하는 상황으로 몰아갔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특히 공장관의 사표가 반려된 뒤 권부장은 공장관이 김대통령의 대북정책에 불만을 토로한 사실을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재차 경질을 건의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대통령은 평소 공장관에 대해 깊은 신뢰를 표시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권부장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공장관의 사퇴이유는 공식발표로는 ‘건강악화’였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대북정책과 한미관계를 둘러싼 외무부와 안기부의 갈등이었고 ‘인민군 전력’이 빌미가 됐던 것이다.

〈이동관·김차수기자〉dk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