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청록파 박두진 선생의 별세로 이제 한국시에서 ‘청록파(靑鹿派)’의 시정신은 역사 저편으로 이월(移越)되고 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인간과 자연의 분리 대립으로 인한 환경파괴, 지구존속을 위해서는 ‘개발 성장’모델 대신 새로운 생존양식이 제시돼야 한다는 요구가 절박한 20세기말에 그들의 시정신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의 가치로 새롭게 조명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고려대 최동호교수는 청록파의 시사(時史)적 의의에 대해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재인식이 요구되는 이 시점에서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시가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을만한 자산”이라고 평가했다.
박두진 조지훈 박목월 3인의 청록파는 한국현대시사에서 ‘자연(自然)’을 메시지 전달의 수단이 아닌 대상 그 자체의 의미로 파악한 최초의 시인들로 꼽힌다.
“문학이 궁극적으로 자연의 모방이라고 하지만 한국근현대시사에서는 청록파 이전까지 자연이 그렇게 많이 노래되지 못했다. 식민치하에서 현대시 전통이 형성되며 싫든좋든 문학적 발언은 정치 사회적 상황에 경사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대 오세영교수의 지적이다.
청록파 3인은 30년대말 ‘문장’지를 통해 이들을 데뷔시킨 시인 정지용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모더니스트로 출발했던 정지용은 농경사회의 틀을 벗지못한 식민지 조선에서의 모더니즘은 소수엘리트들의 지적 사치일 뿐이라는 자각에 도달한 뒤 동양사상과 자연탐구에 몰두한다.
지용의 정신적 그늘에서 성장한 세 사람은 박목월의 경우 향토성, 조지훈은 유불교철학이 통합된 선(禪)적 세계, 박두진은 기독교적 사상에 기초한 원죄 이전의 자연희구 등으로 각기 다른 개성을 보여주면서도 한국적 서정시의 새로운 정형을 만들어나갔다.
일제말과 격동의 해방공간이라는 시대상황 아래서 “구원받을 수 있는 따뜻하고 순결한 자연을 토착적 정서로 노래한”(오세영교수) 이들의 시는 독자들의 가슴에 스며들 수밖에 없었다. 특히 박두진은 ‘해’등 음악성이 뛰어난 산문시 형식을 개척했다.
해방 전후 한국현대시사를 잇는 ‘가교’역할을 한 점도 청록파 3인의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다. 다수 문인들의 납·월북으로 문학적 공황을 맞았던 50년대, 남한 시단의 구심점이 된 인물은 30대 한창 나이의 미당 서정주와 청록파 3인이었다.
청록파의 시는 민중운동이 한창이던 80년대 ‘현실도피의 음유시’로 비판받기도 했다. 그러나 세 사람이 최후의 순간까지 한국적 순수서정시 창작의 한길을 걸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이는 드물다.
〈정은령기자〉ry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