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경제는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다.”
95년 4월13일 중국을 방문중이던 삼성그룹 이건희(李健熙)회장의 이른바 ‘베이징(北京)발언’을 보고받은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반응은 간단치 않았다.
당시 이회장 발언의 전문(全文)을 보면 대통령이 노발대발할 내용보다는 경청해야 할 대목이 훨씬 많다.
이회장이 베이징 주재 한국특파원들과 가진 1시간35분에 걸친 오찬간담회 발언내용은 이랬다.
“대통령의 개혁의지에도 불구하고 행정규제와 권위의식이 없어지지 않는 한 21세기에 우리가 앞서 나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현재 위치를 지키는 것조차 어려울지도 몰라요. 반도체는 장쩌민(江澤民)중국국가주석이 ‘몇 비트냐’‘R&D 비용은 얼마냐’고 물을 정도로 관심을 많이 갖는 분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반도체 공장 건설을 신청해도 허가가 나오질 않아요. 공장 건설하는 데 도장이 1천개나 필요합니다.
첨단산업이라고 우대받는 반도체가 이 정도니 다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요. 정부는 행정규제가 많이 완화됐다고 생각하는 모양인 데 이 정권 들어서고 나서도 크게 완화된 게 없습니다. (중략)솔직히 얘기하면 우리나라는 행정력은 3류급, 정치력은 4류급, 기업경쟁력은 2류급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삼성과 정부에 대해 밀월관계란 말도 있지만 사실은 가장 ‘앤티(anti·적대적)’한 관계입니다. 자동차 허가도 부산시민이 반발하니까 내준 것 뿐이지요.”
내용도 놀랍지만 누가 들어도 ‘작심하고 하는’ 말이었다. 함께 있던 기자출신의 참모가 즉각 수습에 나섰다.
“이회장도 언론계에서 사회의 첫발을 내디딘 분으로 사실 여러분의 선배격이다. 따라서 오늘 얘기는 기자 선후배가 격의없이 나눈 사담(私談)이므로 오프더레코드(비보도) 조건이다.”
이회장은 간담회 직후 베이징 시내에 있는 한국대사관을 방문, 황병태(黃秉泰)대사에게도 같은 얘기를 반복했다. 당시 경제공사를 맡고있던 외교통상부 김광동(金光東)국제경제국장이 기억하는 대화내용.
△이회장〓리펑(李鵬)중국총리는 경제전문가가 아닌 데도 안목이 매우 높습디다. 중국도 규제를 풀어가며 개혁을 서두르는 데 서울은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황대사〓우리 정부도 마이크로 경제(개별기업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회장〓김영삼정부의 개혁이 지향하는 바가 도대체 뭡니까?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높여주지 않고 무슨 국제화 세계화입니까?
이회장의 정부 비판이 점차 수위를 높여가고 있을 때 황대사의 비서가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고 알렸다.
황대사는 비서가 다시 찾아와 귀엣말로 ‘이원종(李源宗)청와대 정무수석의 전화’라고 귀띔하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수석의 목소리에는 화가 잔뜩 묻어 있었다.
△이수석〓대사님, 이건희삼성회장이 기자회견을 했다던데요. 정부를 크게 비판했답니다. 한번 알아보셔야겠습니다.
△황대사〓(이 때까지 기자회견 사실은 알지 못하고)그래요? 사실은 이회장이 여기 와 있습니다.
△이수석〓(약간 놀란 듯)그렇습니까? 잘됐네요. 좀 알아봐주시죠.
이회장은 ‘서울전화’가 어디서 온 것인지 금방 눈치챈 듯 움찔했다. 이회장은 “내 관련 전화입니까. 나하고 더 얘기하면 황대사가 좋지 않겠군요”라며 서둘러 대사관을 떠났다.
황대사는 이회장에게 “공항에 도착하면 청와대를 향해 절이라도 한 번 하세요”라며 농담반 충고반의 작별인사를 건넸다.
황대사는 이회장의 기자회견 관련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별도로 나름대로의 판단을 곁들인 ‘관찰보고서’를 첨부했다.
“이회장의 의도는 기업과 정부, 그리고 정치권이 혼연일체가 돼 나라를 잘되게 하자는 뜻이지 나쁜 의도가 담겨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김대통령의 반응은 달랐다. 김대통령과 40년 가까이 허물없는 사이로 지내온 김윤도(金允燾)변호사의 기억.
“그 무렵 김대통령과 저녁을 같이 했는데 대통령이 이회장의 베이징발언을 꺼내며 몹시 화를 냈습니다.”
이회장에 대해 김대통령이 ‘좋지 않은 인상’을 갖게 된 데에는 차남 현철(賢哲)씨와 현철씨의 측근인 김기섭(金己燮)전 안기부운영차장의 정보보고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상도동계 인사들의 판단이다.
한편 이회장의 발언을 전해들은 삼성에서는 난리가 났다.
14일 현명관(玄明官)비서실장 주재로 긴급사장단회의를 열고 우선 16일로 예정된 이회장의 귀국을 취소했다. 수습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이회장도 깜짝 놀라 처남인 홍석현(洪錫炫)중앙일보 사장을 16일 중국으로 불러 본국 분위기를 탐색했다.
또 현실장이 한이헌(韓利憲)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을 찾아 가는 등 정부 요로에 진사사절을 보냈다.
“이회장의 의도는 정부가 삼성과 밀월관계에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려다 말이 좀 어긋난 것 뿐이다. 삼성의 승용차 진출 이후 특혜설 때문에 정부도 부담을 느끼고 있지 않았느냐. 결코 정부를 비난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당시 재계에서는 ‘모두 맞는 말 아니냐. 속이 시원하다’는 반응과 ‘새 정부에서 승용차사업 진출, 외자조달 등 혜택은 다 받아 놓고 무슨 앤티냐. 웃긴다’는 또 다른 반응이 나왔다.
베이징 발언이 있은 지 닷새 뒤인 4월18일 김포공항에 도착한 이회장은 이렇게 해명했다.
“베이징 발언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표현이 다소 미숙해 국민에게 본의 아니게 물의를 일으켜 미안하다.”
청와대가 분노를 표시하기 시작했다.
‘4월29일 부산에서 있을 삼성승용차 공장 기공식에 국장급 이상은 참석하지 말라’는 지시가 떨어진 것. 이에 따라 이 행사에는 통상산업부 자동차담당 과장만 참석하기로 했다.
그러나 내부에서 ‘부적절한 과잉대응’이라는 지적이 일자 곧 이 지시는 철회됐다. 이 때문에 박재윤(朴在潤)당시 통산부장관은 일본 출장 일정을 바꿔가며 기공식에 참석했다. 당초 26일 아침에 김포발 일본행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으나 일정을 바꿔 이날 오전 기공식에 참석하고 오후에 김해공항에서 일본으로 출발한 것.
그렇다고 청와대의 분노가 누그러진 것은 아니었다.
잘 나가던 ‘삼성호’에 제동이 걸렸다.
삼성항공의 F5 전투기 국제공동개량사업은 정부의 기술도입 승인을 받지 못해 무산위기를 맞았고 영광 원전 5,6호기 건설에도 응찰하지 못했다. 미국 반도체공장 설립도 제동이 걸렸다. 되는 일이 없었다.
7월22일 김대통령의 방미 때 삼성은 ‘한국전 참전 기념비’ 건립을 위해 5백만 달러나 냈지만 재벌총수 중 유일하게 수행하지 못했다. 삼성은 이회장의 수행 가능성을 막판까지 타진했으나 청와대는 대통령이 떠난 22일까지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았다.
당시 이회장은 국내에 남아있기가 불편해 일본으로 건너가 머물고 있었다. 삼성은 방미 중에도 대통령 면담을 요청해놓고 이회장이 일본에서 하와이로 건너가면서까지 통보를 기다렸다. 그러나 결국 이회장은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당초 삼성은 대통령의 체면을 세워줄 요량으로 방미중 ‘텍사스주 오스틴에 15억 달러 규모의 전자공장을 세운다’는 투자계획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삼성의 끈질긴 ‘해빙작전’은 4개월만인 8월에야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방미중 김대통령에 대한 한이헌경제수석의 설득이 주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8월4일 현명관삼성비서실장이 급히 일본에 머무르던 이회장을 찾아갔다.
“바로 귀국하셔야겠습니다. 청와대를 방문할 수 있게 됐습니다. 독대(獨對)입니다.”
“그래요? 고생했소.”
이회장은 8월5일 오후 김포공항에 도착했고 7일 김대통령을 만났다.
이틀 후인 9일 30대 그룹 총수 초청 청와대 오찬에서 이회장은 김대통령 바로 왼쪽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다음날인 10일 삼성은 파격적인 중소기업 지원방안 등을 발표하는 것으로 청와대의 ‘관용’에 화답했다.
이회장은 베이징 발언 직후의 95년 4월18일 김포공항 귀국회견에서 ‘정부에 사과할 것이냐’는 질문에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아직도 사회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은 했지만 끝내 사과는 하지 않았다.
주위에서는 ‘그 대가를 삼성이 넉달 동안 치렀다’고 말하곤 했다.
〈허승호·김창혁기자〉tiger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