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24일 개막된 부산국제영화제는 1년만에 연인을 만나는 것 같은, 가슴설레는 축제다.
그러나 문화의 마당에서조차 ‘정치의 힘’은 ‘문화의 힘’을 누른 것일까.
5천여 관중이 모두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가운데 게스트들의 입장으로 시작된 개막식. 팡파르와 함께 문정수조직위원장의 안내로 들어선 ‘각계 귀빈’들은 김정길행정자치부장관, 신현웅문화관광부차관, 안상영부산시장 부산에 지역구를 둔 국회의원 등 정관계 인사와 재계 인물들이었다.
줄지어 단상 앞까지 행진한 한 무리의 귀빈 중 몇몇은 이미 좌석에 앉아 있는, 영화가 좋아 이곳까지 온 일반 관객들을 일어서게 하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영화배우 감독 등 영화 관계자들이 입장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현장에서 이 장면을 보면서 열흘 전 우리나라를 방문한 로만 헤어초크 독일대통령이 절로 떠올랐다.
‘세계화 시대의 문화적 만남’을 주제로 한 토론회에서 헤어초크대통령은 일반 청중 사이에 섞여 앉아 ‘문화적 충격’을 주었다. 토론이 끝날 즈음 사회자가 대통령에게 한 말씀 청하자 “이 자리에 있으면 부주의한 자세를 취해도 보는 사람이 없어 좋다”며 토론에 대한 정리된 의견을 말했다.
오랫동안 국회가 국민을 외면하면서 시중에서는 “국회의원들을 소환하자”는 등의 원성이 드높은 요즘이다.
IMF사태 이후 국민의 고통을 달래기는커녕 제밥그릇 싸움만으로 지새는 정관계 재계인사들에 대해 애들 말대로 ‘왕따(크게 따돌리는 것)’해야 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문화와 민심을 아는 귀빈, 아니 스스로를 귀빈으로 여기지 않는 힘센 분들을 보고 싶다.
김순덕(문화부)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