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휴대통신(PCS) 사업자 선정기준이 발표되고 나흘이 지난 95년 12월18일 한이헌(韓利憲)청와대경제수석비서관은 출근하자마자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호출을 받았다.
“신문에 ‘통신사업자 선정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던 데 우찌 된 일이고. 동점이 되면 추첨으로 결판낸다는 데 사실이야?”
김대통령이 모 조간신문을 펼치며 화를 냈다.
“동점이 나올 확률이 높지 않습니다. 1만분의 1도 안될 겁니다.”
“국가정책을 ‘또뽑기’로 결정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거야. 무슨 나라 일을 이렇게 하노?”
“진상을 파악해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일단 대통령을 진정시킨 후 그는 정보통신부에 내용을 알아봤다.
그러나 대통령의 지적대로 ‘추첨할 확률이 몹시 크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한전수석은 “당시 ‘어이쿠’하는 탄식과 함께 고개를 갸우뚱했다”고 회고했다.
김대통령은 개별적인 경제사안과 관련해서는 잘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그런 만큼 함부로 고함을 지르는 일도 거의 없었다.
한수석은 자신도 미처 파악하지 못한 문제를 누군가가 대통령에게 자세하게 보고했다고 판단했다. 누군지는 거의 분명했다.
조간신문이 나온 뒤 한수석이 출근하기 전까지의 새벽 시간에 대통령에게 전화로 이런 사실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대통령의 차남 현철(賢哲)씨뿐이었다.
그렇다면 현철씨에게는 누가 그런 내용을 ‘입력’시켰을까.한전수석은 “추첨 방식을 택하면 불리해지는 기업일 것이며, 모 조간지도 거기에 동원됐을 것으로 짐작했다”고 회고했다.
어쨌거나 선정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상 제도변경은 불가피했다. 며칠 후 경상현(景商鉉)정통부장관이 물러나고 이석채(李錫采)씨가 취임했다.
한수석은 오랜 친구 사이인 이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관 취임 축하해. 그런데 왜 장관이 바뀌었는지는 알고 있지.”
“그럼 이 사람아. 걱정 말게.”
이장관은 취임 즉시 사업자 선정방식을 수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정통부 관계자의 증언.
“경장관은 처음에 미국처럼 주파수 경매제를 하려고 했어요. 사업을 하려는 업체들이 비싼 값을 내고 주파수를 사게 되면 국고수입도 늘고 특혜시비도 없으니까요. 그러나 이 방식은 재벌에 절대 유리할 수밖에 없지요. ‘재벌들의 돈잔치’ ‘돈놓고 돈먹기’라며 여론도 나빴어요. 당시 반도체사업으로 떼돈을 번 삼성 LG 현대 등에서 1조원 이상을 쓴다는 얘기도 나왔지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방법을 바꿨지요.”
고심 끝에 내놓은 안이 △서류심사 △출연금 비교 △추첨의 3단계 방식. 1차 서류심사를 통과한 업체들이 최고 1천1백억원까지 정부에 낼 출연금 액수를 써내고 금액이 같을 때는 추첨으로 결판을 낸다는 것.
그러나 이 방식은 추첨까지 갈 가능성이 높았다. 서류심사는 웬만한 기업이면 통과할 수 있는 성격이었다. 당시 재벌들은 PCS를 ‘21세기 재계판도를 좌우할 황금알사업’으로 욕심내고 있어 최고한도의 출연금을 쓸 만한 분위기였다.
당시 정통부는 추첨을 할 경우 재벌총수가 직접 나오도록 하는 방안까지 구상하고 있었다. 담당 임원이 추첨했다가 안되면 ‘재수없는 손’이라며 애꿎게 문책당하는 일을 미리 막기 위해서였다.
정통부 계획대로 됐다면 이건희(李健熙)삼성 김우중(金宇中)대우 구본무(具本茂)LG회장 등이 나와 추첨하는 진풍경이 연출될 뻔했다.
그러나 이 기준이 발표된 지 닷새만에 경장관은 경질됐다.
취임 후 PCS사업자 선정방식을 바꾸는 일에만 매달린 이석채장관은 실무자들에게 “능력위주로 하되 재벌들이 독식하지 않도록 방안을 짜라”고 지시했다.
96년 3월6일 새로운 사업자 선정방식이 발표됐다.
추첨제를 전면 백지화하고 한국통신을 제외한 2장의 사업권을 통신장비 제조업체와 비제조업체에 1장씩 나눠준다는 것이 주요 내용.
통신장비업체는 삼성 현대 LG 대우 등 재계 ‘빅4’이므로 4대 재벌이 PCS사업권을 ‘싹쓸이’해가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로 풀이됐다.
‘설마 2등은 못하랴’며 느긋하던 삼성과 LG는 초비상이 걸렸고 금호 한솔 효성 등 상대적으로 열세에 있던 기업들은 희색이 만면했다.
국제전화 사업을 준비중이던 한솔은 기준이 이렇게 바뀌리라고 미리 감을 잡았는지 장관이 바뀐 96년 초부터 PCS쪽으로 선회했다. 국제전화 태스크포스팀에 ‘PCS사업 계획서를 작성하라’는 특명이 떨어진 것.
업계 관계자의 회고.
“당시 ‘정보통신에 문외한인 한솔이 어쩌려고 가장 경쟁이 치열한 PCS에 뛰어들까’하는 의문이 들었지요. 그러나 최근 조동만(趙東晩)한솔부회장이 경복고 후배인 현철씨의 비자금을 관리해준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해가 됩디다. 한솔이 현철씨를 통해 로비를 해 장비―비장비군으로 나뉜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96년1월 말 정용문(鄭溶文)한솔기술원장(현 한솔PCS사장)은 기자회견을 자청, “보다 많은 기업에 통신업 진출 기회를 제공하려면 통신장비를 생산하는 4대 그룹과 그렇지 않은 그룹에 PCS사업권을 하나씩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발언은 두달만에 이장관의 입을 통해 똑같이 반복됐다.
이 무렵 삼성은 또 다른 문제로 고민에 빠졌다.
이장관이 남궁석(南宮晳)삼성SDS사장을 만난 자리에서 “삼성은 자동차 사업권을 이미 따냈으니 세계적인 통신장비업체로 남는 것이 어떠냐”며 PCS는 포기하라는 뜻을 전했기 때문. 삼성은 정보력을 총동원한 결과 ‘이것이 정부의 진의’라고 결론을 내렸다.이 때부터 삼성의 뒤집기 작전이 시작됐다. 3월15일 숙명의 라이벌 현대를 끌어들여 컨소시엄 ‘에버넷’을 결성했다. 그리고 LG 대우에도 컨소시엄에 참여하라고 손짓했다.
그러나 사업권 획득에 자신있던 LG는 삼성의 제의를 거부했고 대우는 한참 망설이다가 PCS사업을 포기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삼성 관계자의 증언.
“정부가 발표한 평가항목은 삼성에 절대로 불리했어요. ‘지난 5년간의 신규사업 진출업종을 명시하라’고 했는데 삼성은 승용차사업에 뛰어들었지요. 또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문제삼았는 데 당시 신세계와 제일제당이 완전 분리되지 않아 계열사가 LG보다 많았거든요. 정부가 삼성을 ‘비토’하는 분위기라면 재계연합 방식으로 피해가자는 전략을 세웠지요. 삼성과 현대 양쪽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남궁석 삼성SDS사장이 이건희회장과 정몽헌(鄭夢憲)현대전자회장을 차례로 설득했습니다.”
막판에 ‘도덕성’이라는 변수가 갑자기 등장했다. 이장관이 선정방식을 새로 발표하면서 “대주주의 도덕성을 주요 평가항목으로 삼겠다”고 밝힌 것.
느닷없이 ‘누가 더 비도덕적이냐’는 논란이 벌어졌다. 재벌들끼리 서로를 헐뜯는 난투극이었다.
이런 시점에 LG정유 소속 시프린스호 유조선이 남해안에서 침몰, 기름을 대량 유출한 데다 수습과정에서 뇌물을 제공한 사실이 드러났다. 한솔제지 임원도 공정거래위 간부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구속됐다.
이장관이 갑자기 말을 바꿨다.
“도덕성에 큰 비중을 두지 않겠다.”
당연히 ‘장관이 특정 기업을 봐주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 때 발생한 ‘데이콤’논란이 문제를 더욱 꼬이게 만들었다.
LG와 함께 데이콤의 경영권을 다투던 동양그룹의 안상수(安相洙)기조실장이 “LG는 관계사를 동원해 편법으로 데이콤 지분을 법적한도인 10% 이상 보유, 신규통신사업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LG와 경쟁관계에 있던 에버넷도 데이콤 지분 문제에 관한 공청회를 열자고 거들었다.
파문이 커지자 정통부가 직접 나서 구본무LG회장으로부터 ‘데이콤 지분을 5% 이하로 하고 앞으로 데이콤 경영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포기각서를 받았다.
PCS사업자 선정에서는 전무후무한 청문회 채점방식이 선택됐다. 4월19일 이장관은 “서류심사만으로는 사업자의 능력을 완벽하게 평가하기 힘들어 청문회 방식의 면접심사를 도입한다”고 발표했다.
더구나 이장관은 청문회가 실시된 6월3일 심사위원들을 조찬간담회에 불러 ‘전무(全無)배점방식’이란 기묘한 채점방식을 제안했다. 청문회 점수가 1백점 만점에 2.2점밖에 되지 않으므로 한 업체에 몰아주어야 변별력이 생긴다는 것.
이로 인해 1차 서류심사에서 82.38을 받아 0.37점 차이의 근소한 차이로 에버넷(삼성―현대연합)에 뒤지던 LG가 청문심사에서 2.2점 만점을 받아 최종점수에서는 역전승을 거두는 결과를 낳았다.
검찰이 PCS의혹을 푸는 열쇠로 지목하고 있는 이석채전장관의 귀국거부로 의혹은 아직도 완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 상태다.
〈김학진기자〉jean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