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6월23일 정부과천청사 강경식(姜慶植)재정경제원장관(부총리)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김선홍(金善弘)기아그룹 회장이 말문을 열었다.
“종합금융사들이 무차별적으로 어음을 돌리고 있습니다. 악성 루머 때문에 일시적인 자금난에 휘말려 있습니다. 5천억원만 있으면 부도는 면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러나 강부총리의 대답은 싸늘했다.
“세계무역기구(WTO)시대입니다. 정부가 특정기업을 도와주다가는 제소당하게 돼요.”
이는 누구보다 시장경제를 신봉했던 강부총리의 지론이기도 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물과 기름처럼 겉돌았다.
이날 만남 이후 정부는 본격적으로 기아 처리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기아의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은 속이 숯덩이처럼 타들어갔다.
9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가장 건실한 은행이었던 제일은행은 주거래은행으로 거래해온 유원 우성 한보 등이 잇따라 부도나는 바람에 부실채권이 가장 많은 은행으로 전락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기아까지 침몰하는 일은 상상하는 것조차 끔찍했다.
상황이 다급했던 제일은행을 포함한 채권은행단은 30여 차례에 걸쳐 대책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별다른 묘안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기아에 은밀히 3천6백여억원의 협조융자를 제공했을 뿐이다.
부도가 임박한 7월12일 은행회관에서 류시열(柳時烈)제일은행장과 윤증현(尹增鉉)재경원 금융정책실장 등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아대책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나온 방안은 △협조융자 계속 △즉각 부도 후 3자 인수 △부도유예협약 적용 등 3가지였다.
첫번째 방안은 은행장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기아에 협조융자를 하다가 제2의 한보사태가 터지면 어떻게 수습하겠습니까. 부도가 임박한 기업에 돈을 대준 은행 관련자들이 줄줄이 업무상 배임으로 구속되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쇠고랑을 차자는 말입니까.”
모 은행장이 이 말을 꺼내자 모든 참석자들이 공감하는 분위기였다고 회의에 참석한 김진표(金振杓) 당시 은행보험심의관은 회고했다.
두번째 방안인 부도처리는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 반대했다.
전 청와대 관계자의 증언.
“김대통령은 한보 부도를 계기로 현철(賢哲)씨가 구속되자 넋을 잃어버렸습니다. 부도 공포증이 생긴 것 같았어요. 어떻게 하든지 부도는 내지 말라고 했지요.”
회의가 열린 뒤 이틀 만인 7월14일 4천억원의 어음이 돌아왔다. 이날 오후 늦게 류시열행장이 강부총리와 김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중으로 어음을 못 막으면 내일 부도유예협약에 넣겠습니다.”
기아의 종말인 동시에 한국경제를 국제통화기금(IMF)체제로 몰고가는 파국의 시작이기도 했다.
7월15일 부도유예협약을 적용하겠다는 발표가 나가자 기아측은 즉각 예의 ‘음모론’을 들고 나왔다.
‘현금 3천억원을 동원할 수 있는 기아에게 한마디의 사전 상의도 없이 부도유예를 적용하는 것은 기업을 특정그룹에게 넘기기 위한 음모’라는 주장이었다.
기아가 음모론에 집착했던 것은 삼성에 대한 깊은 피해의식과 함께 경영실패에 대한 변명거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자동차업계의 일반적인 해석.
음모론의 발단은 97년 5월21일 한 조간신문에 조그맣게 보도된 삼성자동차의 ‘자동차산업 구조조정 전망’ 보고서. 골자는 이랬다.
‘향후 기아자동차는 성장 한계에 직면하며 쌍용자동차는 독자적으로 경영위기를 타개하기 힘들다. 일부 부실 자동차 기업의 경영자원을 성장 가능성이 높고 그룹 경영이 안정된 업체로 집중화하는 선행적 대응이 요구된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내용의 이 보고서가 기아와 삼성간의 처절한 싸움의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김선홍회장을 비롯한 기아의 경영진들은 “삼성의 기아흔들기 음모가 드디어 드러났다”며 맹공을 퍼부었다. 6월 중순에는 삼성을 ‘보고서 유출에 따른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그러나 이 강공책은 오히려 기아의 몰락을 재촉하는 부메랑으로 돌아갔다.
나라종금 여신담당 임원의 설명.
“이상하게도 기아가 삼성을 공격할수록 오히려 기아에 대한 불안감만 가중되는 부작용이 나타났습니다. 처음 보고서가 나왔을 때만해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은행과 종금사들은 사태가 법정공방으로 비화하자 ‘진짜 뭔가 있는 것 아니냐’며 불안해하기 시작했지요.”
그러나 보고서 유출이나 기아의 몰락을 삼성의 음모 때문이라고 보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
대외비로 처리된 이 보고서는 삼성이 만들기는 했지만 유출한 사람은 현대자동차의 한 연구원이었다. 삼성자동차의 연구원 한 사람이 대학선배인 현대자동차 연구원에게 보낸 것이 그만 기아의 손에까지 흘러들어간 것.
또 보고서 유출 한 달여전인 97년 4월부터 종금사 등 제2금융권에서 기아의 대출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빚이 너무 많았고 특히 단기부채가 57%를 넘는 불안한 재무구조였던 것. 6월에는 걷잡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4월부터 6월까지 회수된 액수는 무려 5천5백억원. 기아의 내부모순이 먼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기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김회장의 경영 스타일과 노조 권한.
부실회계처리 혐의로 수감중인 한승준(韓丞濬)전 기아부회장이 93년 기아자동차사장에 취임했을 때의 일이다.
노조의 권한이 너무 크다고 생각한 한사장은 김광순(金光淳)소하리공장장에게 “공장 문을 몇 달 닫는 한이 있더라도 노조를 다 잡아야겠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며칠 후 한사장이 갑자기 그만두라는 지시를 내렸다. 잔뜩 긴장했다가 맥이 풀린 공장장이 항의조로 물었다.
“도대체 왜 갑자기 그만두라는 겁니까. 한번은 넘어야 할 산인데요?”
“낸들 그만두고 싶어서 그러겠어. 김회장께서 분란을 일으키지 말라는거야. 전문경영인이 경영하는 업체에서 노사분규가 일어나면 이미지가 훼손된다나….”
기아 주식을 거의 갖고 있지 않던 김회장에게 있어서 노조의 지지는 경영권을 지탱하는 중요한 ‘권력기반’이었던 셈이다.
김공장장은 기아가 몰락한 직후 “당시 제대로 된 노사관계만 확립할 수 있었으면 지금처럼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기아의 법정관리인인 유종렬(柳鍾烈)씨가 얼마 전 단체협약을 개정하기 전까지만 해도 기아노조는 사업장내에서 무소불위의 막강한 힘을 행사했다.
올해 5월13일 아산공장에서 생산직원을 상대로 품질교육을 실시하던 차모부장이 노조간부한테 뭇매를 맞고 입원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도 폭행에 가담한 노조간부는 형사처벌만 받았을 뿐 회사의 징계를 받지는 않았다.
기아에서 이런 일은 잦았다. 당시만해도 징계위가 노사 동수로 구성돼 징계권을 회사측이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다.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에 교육장에 들이닥친 노조간부는 이렇게 주장하며 교육을 저지했다.
“품질교육은 가동률을 향상시키려는 교육이고 이는 결국 인원감축을 낳게 된다. 우리 노조는 노동시간을 단축시켜 일자리를 나눠갖자는 방침을 갖고 있는데 노조원들이 왜 교육을 받고 있느냐. 노조원들은 즉각 자리에서 일어서라.”(기아자동차 상황일지)
기아의 경영 스타일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건이 지난 3월 검찰에 의해 적발됐다. 검찰은 3년 동안 기아 아산만공장과 소하리공장에서 제너레이터 등 자동차부품 4만여개, 20억원어치를 빼돌린 혐의로 기아의 협력업체 직원 등 10명을 구속했다.
기아 소하리공장 근처에서 목회활동을 한 적이 있는 김모목사는 지난해 8월 한 강연에서 기아의 몰락원인을 이렇게 말했다.
“공장 주변의 포도밭에 기아의 부품상자가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포도밭 주인에게 물아봤더니 보관료를 받고 있다고 말하더라. 빼돌려진 부품이었다. 이런 회사가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기아는 최근 3조원의 분식결산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기도 했다.
또 기술자 출신인 김회장은 유난히 품질과 우수한 생산설비에 애착을 가졌다. 비용과 수익성 분석은 뒷전이었다. 기아 아산만공장을 외국언론들은 ‘꿈의 공장’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엄청난 가격 때문에 국내 어떤 업체도 도입을 꺼리는 설비들이 즐비하게 배치돼 있기 때문이다.
류종렬법정관리인은 취임 이후 아산만공장을 둘러보다 깜짝 놀랐다.
“성능은 아주 우수하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 제가 효성중공업에 있을 때 한대도 사지 못한 기계를 기아는 수십대나 보유하고 있더군요.”
재계 랭킹 8위, 자전거에서 시작해 자동차까지 바퀴달린 것은 모두 만들어봤다는 ‘기술의 기아’는 이렇게 환부가 곪아들어가다 마침내 터지고 말았다.
〈이희성기자〉leeh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