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을 읽을 때는 가슴이 뛴다. 김지룡(金智龍)씨의 ‘나는 일본문화가 재미있다’는 책이 그런 책이다. ‘선동렬을 읽으면 일본이 보인다’는 모두(冒頭)의 글부터가 흥미진진하다. 그에 따르면 일본 프로야구는 일본 사회 그 자체다.
우리나라에도 프로야구가 있다. 시작한 지 올해로 17년째다. 1억2천6백만 인구의 절반 가량이 열광한다는 일본 프로야구는 1936년에 시작됐다. 이 일본 프로야구에 외국인 용병이 등장한 것은 1965년이었다. 나고야 돔을 뜨겁게 달군 주니치 드래건스의 선동렬 이종범도 그런 용병이다. 우리는 올해 처음으로 외국인 선수를 수입했다.
▼ 사죄는 日양심의 문제 ▼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용병 수입 첫해에 우리나라 프로야구는 외국인 용병에게 페넌트 레이스 MVP(최우수선수)의 영광을 안겨줬다. OB베어스팀의 흑인 용병이다. 상을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모두 흐뭇했다. ‘유서깊은’ 일본 프로야구에서 외국인 선수가 MVP에 올랐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엽전이 쪽발이보다 낫다’는 한 대학생의 패러디가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일본에 가서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총리와 21세기 새로운 한일(韓日) 파트너십을 구축한다는 공동 결의를 선언했다. 양국 정부와 언론은 이로써 한일관계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평가했다. 일본총리는 과거사문제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공식문서화했다. 일본은 과거사문제가 ‘일단락’됐다고 술렁였다. 여기서 우리는 크게 두가지를 느낀다.
첫째, 일본의 ‘공식사죄’를 유도한 쪽이 우리라는 그 자신감이다. 일본의 국민감정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사죄를 받아냈다. 사죄하기 싫다면 하지 말아라, 그 문제에 크게 괘념하지 않겠다, 우리가 할 말은 이미 다 했다, 사죄는 당신들의 양심 문제다, 더 이상 묻지 않겠다, 그냥 가자, 다만 우리는 잊지 않겠다. 이것이 우리의 화법(話法)이었다.
▼ 세계향해 마음 열기를 ▼
그 화법에 ‘사죄를 문서화하면 국민의 역사인식을 두고두고 제약한다’는 일본 우파의 항의가 자리를 잃었다. 따지고 보면 사죄랄 것도 없다. 문서화한 사죄라고 하지만 내용으로 보면 과거 일본 총리들의 사과발언에서 조금도 나아간 것이 없다. 오히려 후퇴한 측면조차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으로 됐다고 했다. 프로야구 용병 수입 첫해에 흑인 용병에게 선선히 MVP를 안긴 자세와 같을지 모른다.
두번째는 변화의 문제다. 지금 일본과 우리는 과거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개혁에 열중이다. 자본주의 세계화에서 낙후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다. 목표는 글로벌 스탠더드다. 이 개혁과정에서 과거 우리의 산업화가 추종했던 일본형(型) 경제성장과 산업구조가 갖는 의미는 크다. 우리의 시장경제 추구는 개발독재시대 관(官)주도경제의 모델이었던 일본형 경제 청산과 표리관계에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일본의 고민도 같다. 그들의 고도성장을 가져온 호송선단식 경영, 규격대량생산형 산업구조, 원세트 기술주의의 청산 없이 일본의 세계화는 어렵다는 지적이다. 그 개혁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이른바 ‘55년체제’에서 형성된 일본 주류사회의 보수세력이다. 한일 과거사문제에 완강하게 사과를 거부하는 세력도 이 주류 보수파들이다.
일본 주류사회는 프로야구 외국인 용병선수에게 당분간 MVP를 주지 못할 것이다. 이들이 55년체제의 성공신화에서 깨어나 세계로 마음을 열지 않고는 일본은 쉬 바뀌기 어렵다는 진단이다. 그 일본 주류사회 보수파정권이 경위야 어찌 됐든 우리에게 과거사를 문서로 사죄했다. 우리는 이들에게 변화를 주문했고 그들은 우리의 주문을 일단 수용했다. 그렇다면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나아가 일본의 세계화를 여는 열쇠는 이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일까.
▼ 보수집단 망언 삼가야 ▼
일본 하기 나름이다. 일본 스스로 바뀌어야 한다. 우리나라에 수학여행 온 일본 고등학생들은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눈물을 흘리며 한일 과거사를 배운다. 죄책감 속에서 ‘역사의 공유’를 생각하고 바다를 잇는 가교가 되기를 다짐한다. 미래를 쌓아갈 책무를 느낀다. 이것이 한국관광공사가 일본 수학여행생들을 대상으로 모집한 감상문들에 담긴 마음이다. 이런 마음들이 자라고 모여 새로운 시민사회가 이뤄질 때 일본은 바뀔 것이다. 그동안 일본 주류 보수층은 망언을 삼가야 한다.
김종심(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