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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삼엽할머니 『일제 軍위안소, 전투현장에도 설치』

입력 | 1998-10-14 19:41:00


일제의 군위안소 설치 운영은 부대주둔지뿐만 아니라 전투현장에까지 출장형식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이 14일 처음으로 밝혀졌다.

1937년 중국 네이멍구(內蒙古) 바오터우(包頭)시의 일본군위안소로 끌려가 4년여 동안 위안부생활을 강요당했던 배삼엽(裵三葉·74)할머니는 “일본군이 중국군과 전투할 때마다 남한출신 위안부 중 일부를 차출해 현장으로 데리고 다녔다”고 증언했다.

현재 베이징(北京)시 충원(崇文)구에 살고 있는 배할머니는 “일본군은 위안부들을 전투지역으로 데리고 간 뒤 중국인 집을 강제징발해 임시위안소로 사용했다”며 “민가가 없는 경우에는 텐트로 된 군막사에 위안부들을 몰아넣고 서너명이 한방에서 야욕을 채우는 만행도 저질렀다”고 폭로했다.

경남 하동군 화개면이 고향인 배할머니의 비극은 13세때 돈벌게 해주겠다는 ‘최가’라는 일본군위안소 중간관리자의 꾐에 넘어가면서 비롯됐다.

그는 부산 마산 진주 등지의 15∼17세 처녀 20여명과 함께 인천항에서 배편으로 중국 옌타이(煙臺)항과 톈진(天津)을 거쳐 네이멍구 바오터우시의 군위안소로 끌려갔다.

부대 부근의 단층건물로 된 위안소에는 ‘아사히칸(朝日館)’이란 간판이 붙어있었고 10여개의 방이 있었다. 한국처녀 20여명은 이곳에서 낮에는 일본군 손님을 받고 밤에는 5,6명씩 함께 모여 잠을 잤다. 배할머니는 “말을 잘 듣지 않으면 구타는 물론 총으로 쏴죽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배할머니가 위안부생활 4년만에 위에서 피를 토해내는 병을 얻어 귀국했다. 몸이 회복된 그는 다시 살길을 찾아 중국의 톈진으로 흘러들었다. 이어 잠시 댄서생활을 하다 일제 패망 후 베이징으로 옮겼고 중국인과 결혼했다가 6년만에 헤어졌다.

이후 채소장사 등으로 어렵게 살아온 배할머니는 36세때 태어난 지 사흘된 조선족 여자아이를 양딸로 데려다 키웠으며 이 딸이 최근 출가한 뒤 요즘 사위가족과 아래위층에 살며 외로움을 달래고 있다.

〈베이징〓황의봉특파원〉heb861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