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도 입시부터 무시험전형을 도입하는 서울대가 고교등급제를 강행할 뜻을 밝혔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고교간 학력격차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방침은 무시험전형의 취지를 뿌리째 흔드는 무모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무시험전형은 자질이나 리더십 등 학업성적 이외의 요소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신입생을 선발하는 제도다. 반면에 고교등급제는 학업성적이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 그럼에도 서울대가 자꾸 고교등급제를 고집한다면 교육개혁에 역행한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고교등급제는 현실적으로 각종 부작용을 양산할 것이 뻔하다. 대학입시에 고교간 학력차를 반영할 경우 필연적으로 고교를 서열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무엇보다 평준화지역에서 소속 학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비평준화지역에서는 명문고 입학을 위해 중학교 때부터 치열한 입시경쟁이 벌어질 것이다. 대학 과열입시를 막자고 도입한 무시험전형이 고교등급제로 인해 입시전쟁을 더욱 확대시킨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도 서울대측이 ‘도입 안한다’는 당초 방침을 번복하면서까지 고교등급제에 매달리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없지 않다. 전국 고교의 학력차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실제로 올해 한 사설 입시기관이 실시한 모의수능시험에서 성적이 가장 좋은 고교와 가장 나쁜 고교의 평균점수 차이가 4백점 만점에 무려 2백32점이나 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대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그러나 대학들이 다투어 무시험전형을 도입하고 교육당국도 이같은 ‘입시혁명’을 적극 지원하고 있는 것은 수능성적을 유일한 잣대로 하는 기존 선발방식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보자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국내 대학입시 흐름을 주도해온 서울대가 책임감을 바탕으로 과거 입시방식에서 과감하게 탈피할 수 있을 때 새로운 대학입시 풍토가 정착될 수 있다.
교장추천제 등 일부 대학에서 실험적으로 실시중인 무시험전형이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은 무시험전형의 정착과 성공을 위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무시험전형으로 입학한 학생들이 일반 학생들보다 학업성취도가 높다는 조사결과는 이전 입시방식의 맹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무시험전형에 믿음을 갖게 해준다. 서울대는 과거 수십년간 우수 인재를 독점하다시피 선발해왔으나 국민이 체감하는 사회기여도는 크게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서울대가 지금부터라도 대학개혁에 적극 동참하고자 한다면 고교등급제는 포기하는 것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