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월가에 부는 바람이 제법 차갑다. 언제 가을이 오나 했는데 이제 겨울의 예감까지 스친다. 맨해튼의 올해 겨울은 어느 때보다 추울 것 같다. 지난 몇년 동안 추위를 모를 정도로 뜨거운 열기를 느꼈던 호황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느낌이다.
사람들의 움츠린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언제 해고통지문이 날아올지 몰라 불안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미국 최대증권회사인 메릴린치사가 최근 3천4백명을 감원하면서 해고 선풍이 불고 있다. 가장 튼튼하고 확실하다는 메릴린치에서 일하면 중간간부만 돼도 연봉 50만달러를 받는다. 이들이 해고통지문 한장으로 당장 내일부터 갈곳 없는 실직자 신세가 되는 것이다.
월가가 더욱 비정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람들을 내보내자 메릴 린치의 주가하락이 멈췄다는 점이다. 그만큼 감량경영을 통해 위기에 잘 대처하고 있구나 하는 인식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메릴 린치가 감원한 것은 수지가 적자여서가 아니다. 흑자는 흑자였지만 지난해 같은 분기에 비해 수익률이 떨어지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수익률이 더 떨어질 것에 대비, 체중 감량에 들어가는 기민성이 투자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이다.
월가의 비정한 논리는 뉴욕에 그치지 않는다. 세계 각국을 ‘단죄’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지난해 한국의 외환위기도 같은 기준에서 볼 필요가 있다. 최근 이규성재정경제부장관을 비롯해 한국의 고위관계자들이 한국투자설명회를 개최한다고 뉴욕을 여러차례 다녀갔다.
아니나 다를까. 월가의 친구들이 그런 설명회를 왜 하느냐고 물어왔다. 한국의 외환보유고나 경상수지 흑자가 몇백억달러에 이른다면서 투자를 호소했지만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월가에서는 주말을 제외하면 하루 15시간씩 일하는 게 보통이다. 주로 하는 일이 한국처럼 투자를 유치한다면서 밖으로 나도는 게 아니라 앉아서 각종 자료들을 정독하는 것이다. 그런 뒤 정확한 분석에 근거해 보고서를 작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투자를 한다.
이들은 한국이 수출은 늘지 않고 수입억제로 흑자가 늘어난 사실도, 현재 90%인 단기부채의 상환기간 연장률이 그 이하로 떨어지면 한국은 제2의 환란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스티브 마빈이라는 비관론자가 쓴 한국경제 리포트를 안 읽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정부가 현대자동차 노사분규에 개입한 것도 좋지 않았다. 이들은 정부가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해결할 의지가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장밋빛 전망이 아니라 각론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다. 한국투자설명회에 몇명이 참석, 성황을 이뤘다고 보고하기 바쁜 한국 관료들의 능력이나 인식으로는 이들의 궁금증을 풀 수 없다. 이들은 답변되지 않은 것에는 매우 부정적인 점수를 준다. 여기서 한국투자설명회가 아니라 한국투자반대설명회로 바뀌는 것이다.
한국은 우수한 인적 자원을 바탕으로 고도성장을 일궈냈지만 지금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이 인적 자원인 것 같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거나 하면 된다는 구호를 남발하는 관료나 경제인들은 이제 곤란하다. 치밀하고 냉정한 경제분석력을 갖춘 사람들로 대체돼야 할 시점이다.
윤태희(뉴욕 한국경제정보회사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