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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話 문민정부 81]「재벌병폐 축소판」 한보그룹(上)

입력 | 1998-10-26 19:51:00


97년 1월4일 한보그룹의 주거래은행인 서울 종로구 공평동 제일은행 본점 11층 신광식(申光湜)행장실.

한보그룹 정태수(鄭泰守)총회장이 신행장을 찾아가 마주 앉았다.

자금난 때문에 벼랑까지 몰린 정총회장이 회사 사정을 설명하며 통사정을 했다.

“신행장, 정말 이렇게 나올 겁니까. 조금만 더 밀어주면 됩니다. 막판에 어쩌자는 거요.”

“얼마나 더 해달라는 겁니까. 이제 우리 은행도 한계점에 이르렀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다른 은행에만 담보를 주고 제일은행에는 안줘도 되겠습니까.”

“아니 정총회장, 말을 마구 하시는군요. 그게 지금까지 신세를 진 사람이 할 소리입니까.”

“부도가 나면 이 정태수 혼자 죽을 것 같습니까. 신행장도 함께 죽는 겁니다.”

정총회장의 말은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만일 부도가 나 수사를 받게 되면 정총회장의 돈을 받은 신행장의 비리를 밝히겠다는 암시로도 들렸다.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그러나 곧 이어 신행장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나왔다.

“뭐, 공갈이야 뭐야. 그래 같이 죽읍시다. 맘대로 하세요. 그렇지만 내가 구속되더라도 더 이상 은행돈은 못 줍니다.”

흥분한 나머지 호흡마저 거칠어진 정총회장은 씩씩거리며 행장실을 나가고 말았다.

그로부터 한달 뒤인 2월5일. 신행장은 禹찬목조흥은행장과 함께 정총회장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두 행장은 96년 7월과 8월 서울 하얏트호텔 1950호실에서 각각 한보에 대한 특혜대출과 관련, 4억원씩을 받은 사실이 드러난 것.

하얏트호텔 1950호실은 정총회장이 정관계는 물론 금융권에 대한 로비장소로 사용하던 방이었다.

그는 96년 초부터 60여회에 걸쳐 이 방으로 각계 인사들을 은밀히 초청, 저녁을 대접하면서 로비를 벌이고 돈을 건넸다.

당시 ‘은행 문턱 높다 하되 한보 아래 뫼이로다’라는 말이 나돌았던 것도 정총회장의 이처럼 왕성한 로비력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97년 1월23일 한보가 부도처리될 때 금융권의 한보에 대한 부실대출 규모는 5조원. 이른바 ‘무분별한 차입경영’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90년 12월29일 당진제철소 기공식장에는 맨 앞줄에 정총회장과 함께 스님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룹 임원과 정총회장의 아들 보근(譜根) 원근(源根)씨 등은 그 뒷줄에 자리했다.

기공식 날짜가 바닷바람이 매서운 12월29일로 정해진 것은 오로지 그 스님의 택일(擇日)에 따른 것이었다.

전 한보그룹 비서실 직원은 “중요한 행사는 그룹 직원들이 함부로 날짜를 잡지 못합니다. 정총회장이 꼭 길일(吉日)을 받아오거든요”라고 전했다.

한보가 부도난 뒤 은행단이나 언론은 ‘한보가 철강사업에 얼마를 투자했는지’를 정확히 알지 못해 적지않은 혼선을 빚었다.

한보그룹 재정본부와 그룹 철강기획팀이 각각 계산한 투자비가 서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투자비 계상이 왜 제대로 안되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 그룹 관계자들은 이렇게 설명했다.

“돈은 총회장께서 직접 챙기는 경우가 많아 아랫사람들은 전체적인 윤곽을 잘 모릅니다.”

국내 14위 규모의 한보그룹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는 믿기 힘든 역술경영, 주먹구구식 경영 등 전근대적 행태들이 태연히 진행되고 있었다.

정총회장은 국회의 한보사건 청문회 당시 “돈 문제야 내가 알지 머슴들이 뭘 알겠느냐”고 말해 기업경영에 대한 그의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보의 또 하나 특징은 ‘의리의 경영’이었다.

한보그룹 계열사중 영상사업을 하는 한맥유니온이란 회사가 있다. 96년 이 회사는 그룹을 홍보하는 영상물을 하나 제작했다.

제작이 끝난 영상물을 직접 본 정총회장은 매우 흡족했는지 그 자리에서 팀장을 불렀다.

“팀원이 모두 몇 명이지.”

“5,6명 됩니다.”

“회식이나 시키시오.”

정총회장이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봉투를 받아 열어본 팀장은 깜짝 놀랐다. 1천만원이 들어있었다.

70년대 말 한보건설이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지은 은마아파트 4천5백 가구가 2년 동안 분양이 안되다가 80년 유가인상과 환율인상 발표 후 20일만에 분양이 끝난 일이 있다.

돈을 마대자루에 담아 은행으로 실어나르는 게 일이었던 당시 정총회장은 어려움을 함께 한 임직원과 심지어 20대 초반의 여직원에게까지 아파트 한 채씩 선물로 안겨주었다.

한보 관계자들은 정총회장은 나름의 ‘쾌척(快擲)의 지론’을 갖고 있었다고 전한다.

△받는 사람이 생각할 액수에 0을 하나 더 붙여라 △사안이 있을 때는 물론 평시에도 꾸준히 관리하라 △한번 맺은 인연은 끝까지 놓치지 말라.

정총회장은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사업하는 사람들 중에는 1백억원을 얻기 위해 1억원도 안쓰는 사람이 있지만 나는 90억원을 쓸 수 있다. 또 앞을 내다보고 1백10억원을 쓸 수도 있다.”

정총회장이 돈을 쓰는 방식이 이렇다 보니 알게 모르게 회사돈이 새는 일이 비일비재였다.

좋은 예가 전규정(田圭正)동아시아가스 사장의 경우.

한보그룹이 시베리아 가스전 개발을 위해 세운 이 회사에 96년 스카우트 된 전사장은 한보의 ‘느슨한 내부관리’를 재빨리 간파했다.

그는 97년 11월 러시아 가스전 지분을 팔면서 3중 계약서를 작성했다. 실제로는 5천7백90만달러에 팔면서 정총회장의 4남으로 그룹 부회장인 한근(瀚根)씨에게는 5천2백만달러에 판다고 속이고 5백90만달러를 가로챘다. 한근씨는 다시 이를 2천5백20만달러에 판 것처럼 국내 채권단에 허위신고해 차액 3천2백70만달러를 해외로 빼돌렸다.

속고 속이는 양상이 벌어진 것.

정총회장이 그룹 중역회의에서 남긴 말은 전설처럼 내려온다.

“요즘 너무 심한 것 같아. 너무 해먹지는 말도록 하시오.”

그렇지만 정총회장은 부정과 관련된 임원들을 한 사람도 해임하지 않아 일각에서는 ‘통이 크다’는 평가를 받았다.

돈과 의리 챙기기, 남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위층 접근능력 등을 두고 정총회장에게 붙은 별명이 ‘로비의 달인’이다.

그러나 한보가 몰락하는 과정은 로비의 달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보철강이 부도처리되기 전날인 97년 1월22일 낮 제일 산업 조흥 외환 등 4개 은행장들이 회동했다.

이 자리에서 한보철강의 은행관리가 결정됐고 이는 즉시 한보에 통보됐다. △한보의 경영권을 인수하고 △정총회장 일가의 주식 3백60만주를 담보로 받으며 △이들 주식의 임의처분 동의각서를 받아낸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거부할 경우 ‘부도처리한 뒤 법정관리한다’는 것이었다.

은행관리는 정총회장 입장에서 볼 때 자기 지분을 소각해야 하는 법정관리보다는 나은 것이었다. 또 은행관리가 이뤄지면 한보철강 이외의 나머지 계열사의 경영권을 유지할 가능성도 컸다.

그러나 23일 오후 3시반경 주권을 가지고 제일은행을 찾아온 한보측 인사는 “주식은 내놓겠지만 임의처분은 안된다”고 선언했다.

제일은행은 이를 거절하고 주식을 돌려보냈다.

오후 4시에 열린 45개 채권금융단회의는 단 3분만에 끝났다. 그리고 1시간반 만인 오후 5시반 한보는 부도처리됐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정총회장은 이날 밤 주식처분동의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이미 부도공시가 나간 뒤였다.

“여러 임원이 주식처분동의서에 서명하라고 진언했지요. 그러나 정총회장이 고함 한 번 지르면 그만입니다. 그게 한보의 분위기였어요.”

정총회장은 은행과 정치권이 한보를 부도처리하려 한다는 사실을 전혀 읽지 못했다. 스스로 관리하던 몇 개의 정보라인이 끊어지자 한보그룹 전체가 귀머거리, 장님의 상태가 되고 말았다.

한보 몰락의 마지막 요인은 ‘총수의 독단경영’에 ‘정보부재’가 겹쳤기 때문이었다. 한보 로비의 특징인 이른바 ‘성층권 로비’ 탓이었다.

정총회장 혼자서 권력 핵심부를 대상으로 거액을 동원해 로비하는 방식이었지 땅에 뿌리를 내리는 ‘저변 로비’는 없었다.

부도가 났을 당시 한보 관계자들은 정작 옛 재정경제원 해당라인에 있는 과장 이름조차 제대로 모르는 실정이었다.

이같은 측면에서 정총회장은 ‘로비의 달인’이 아니라 로비의 기본을 몰랐던 사람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 업계의 지적이다.

과도한 차입, 로비를 통한 유착, 총수의 독단, 엉성한 내부관리, 도덕적 타락, 전근대적 경영 등으로 요약되는 한보그룹은 한국 재벌의 문제를 총체적으로 망라한 축소판이었던 셈.

결국 한보는 스스로의 몰락을 자초한 것은 물론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을 부실금융기관으로 전락시켰고 나아가 국가경제마저 위기로 몰아가고 말았다.

〈허승호기자〉tiger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