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바뀐다.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몰아치는 바람이 바뀐다. 차분히 성찰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하나의 태풍이 지나간 뒤로 또 하나의 태풍이 거칠게 달려온다. 세상은 바람과 모래와 자욱한 티끌로 뒤덮인다.
▼ 「총풍」 맞은 文化논리 ▼
바로 어제까지 우리의 화제는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었다. 계기야 어쨌든 오랜만에 문화가 대화의 주제로 떠오르고 우리 문화의 현재와 바람직한 미래를 위한 진지한 토론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총풍(銃風)이 또 덮쳤다. 세풍(稅風) 사정풍(司正風) 총풍이 한차례씩 거칠게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잠깐동안의 고요를 틈타 막 파릇하게 솟아오르던 문화의 싹이 제2의 총풍에 짓밟혔다.
좋게 말하면 역동적인 사회다. 갈등과 투쟁이 분출하는 힘이 넘치는 사회다. 젊고 활기찬 사회, 아직 정형(定型)이 고착되지 않은 창조적인 사회다. 나쁘게 말하면 근본이 흔들리는 사회,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뿌리없는 풀잎처럼 물 위에 부유(浮遊)하는 사회다. 때로는 정의(正義)조차 흔들리고 옳고 그름이 시시각각으로 바뀐다. 인간다운 삶의 양식을 생각할 여유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사회다.
그런 사회에 자본의 윤택함으로 세련되게 포장된 일본의 대중문화가 들어온다. 들어오도록 문을 열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주변에 넘쳐 흐르는 일본 문화에 못본체 등을 돌린 시간이 너무 길었다는 ‘반성’도 뒤따랐다. 그 반성에는 우리 문화의 주체성과 잠재력을 과소평가했을 수도 있다는 반성까지 포함됐다. 거칠지만 힘이 분출하는 그만큼 우리의 문화능력은 역동적일 수 있다는 점을 지나쳤던 것이다.
문화란 주어진 공간에서 한 시대를 같이 사는 사람들의 생각 느낌 행동을 모두 합친 것이라고 한다. 문화상품은 그 총합의 표현물이다. 하나의 문화상품에는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지혜 세계관 상상력 욕망 감성 등이 어우러져 담겨 있을 수밖에 없다. 문화상품은 당대 문화의 총체적 역량을 담는 그릇이고, 이 상품을 통해서 문화는 유통되고 소비되고 교류된다.
▼ 소비자의 안목 높여야 ▼
책을 사는 것도, 조각이나 도자기를 사는 것도, 건물이나 교량을 짓는 것도, 비디오나 음반을 사는 것도 모두 문화를 소비하는 행위다. 다만 그 많은 문화상품 가운데서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는 것은 문화소비자의 필요와 감수성에 맡길 수밖에 없다. 강요할 수도 없고 차단할 수도 없다. 그런 뜻에서라면 지금 정부가 선언한 일본문화에 대한 ‘단계적’ 개방도 결코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물론 문화개방 후 일본의 저질 음란 폭력 퇴폐문화는 기존의 우리 법체계로 철저히 걸러내야 한다. 시장자율을 교란하는 불법거래나 불공정거래 역시 법으로 제재해야 마땅하다. 그것은 우리 문화를 청정하게 유지하는 최소한의 자위(自衛)행위이자 ‘배척을 위한 경쟁이 아니라 공존을 위한 경쟁’을 보장하기 위한 노력이다. 외래문화건 토착문화건 문화란 결국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 한에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선택을 언제까지나 법으로 제약할 수는 없다. 법보다는 문화수용자의 이해능력과 형상화능력, 그 심미적 안목을 높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한마디로 사회 전체의 인문학적 교양 수준을 높이는 일이다. 부(富)는 갑자기 얻을 수 있어도 문화능력을 하루 아침에 높일 수는 없다. 우리 주변의 졸부문화와 거기에서 파생되는 퇴폐문화, 공공질서와 예절의 파괴가 그것을 말해준다.
▼ 정치수준이 더 큰 문제 ▼
문화관광부가 일본문화 개방 하루 전에 발표한 새 문화정책은 그런 점에서 본질을 놓쳤다는 인상을 준다. 21세기 문화경쟁력은 ‘문화를 통한 고부가가치 창출’이라는 산업정책이 아니라 국민의 문화 감수성 향상이라는 인문학적 성찰에서 찾아야 옳다. 물론 문화기반시설의 확충은 급하다. 그러나 더 급한 것은 그 인프라에 담을 문화의 질을 높이는 일이다. 그것은 교육의 문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정치다. 정치가 오늘의 수준에서 맴도는 한 사회의 교양수준은 올라가기 힘들다. 정치야말로 사회교육의 생동하는 현장이다. 정풍(政風)이 문화의 싹을 꺾지 말아야 한다.
김종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