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방한했던 로만 헤어초크 독일대통령이 3박4일간 묵은 호텔에서 쓴 비품은 수건 6장이 전부였다. 식사 가운데 두번은 수행원들과 피자를 나눠 먹는 것으로 끝났다. 일행 76명이 이용한 세탁서비스는 단 3건이었고 룸서비스는 커피주문 뿐이었다. 국빈 일행의 숙박비와 추가비용은 우리 국민 주머니에서 나간다.
김영삼(金泳三) 전대통령은 96년 아태경제협력체(APEC)회담 때 APEC교육재단에 1천만달러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따라 작년에 1백만달러가 지출됐고 올해 예산에 1백50만달러, 내년 예산안에 1백만달러가 잡혀 있다. 미국 민간단체인 이 재단에 돈을 대는 제삼국은 한국 뿐이다.
부모의 실직 등으로 납입금을 내기 어려운 중고생들이 올해는 학비감면 혜택을 받고 있다. 실업대책비 중에서 1천억원이 배정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산청은 이 부분의 내년 예산안 2천3백억원을 수용하지 않았다. 교육부는 이들 중고생이 학업 포기의 위기에 처했다고 여론에 호소한다.
서울의 1백44개 초중고교는 지난해 교육용 기자재를 구입하면서 일부 예산을 빼돌렸다. 업자와 짜고 컴퓨터 등 조달물품을 시중에 내다팔거나 조달대금을 꿀꺽했다. 요즘의 ‘학교 새물결운동’도 예산잔치판이다.
농어촌 구조개선사업에 92년부터 43조원의 예산이 들어가고 있지만 그 효과를 체감하는 국민은 적다. 최근의 젖소 보급사업 등에서도 예산 누수(漏水)가 나타난다.
국방부는 국제인증도 받지 못해 생산이 불투명한 인도네시아제 수송기를 도입하기 위해 올 3월에 3백60억원 규모의 선수금을 지급했다. 율곡이다 백두다 하는 무기 구입사업의 부실집행과 비리로 인한 국고손실은 수천억원을 오르내린다.
일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는 연말이면 ‘예산파티’를 벌인다. 멀쩡한 보도블록을 갈아엎고 주변사람 끌어모아 국제선 비행기에 태운다. 잔뜩 따냈다가 쓰지 못한 예산을 해 넘기기 전에 쓰기 위해 안달이다.
이밖에도 수두룩하다. 91년부터 공사비만 7백51억원을 들인 청주신공항엔 하루 단 두대의 비행기만 뜨고 내린다. ‘현대판 궁궐’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행정부와 사법부의 일부 지방기관장 관사에도 납세자의 피땀이 배어 있다. 5만㎞밖에 운행하지 않은 관용차를 더 큰 새 차로 바꾼 지방자치단체도 있다. 올해 실업대책비 중에서는 황소개구리 한마리 잡는데 1만원꼴로 쓰인 돈도 있다. 수조∼수십조원을 헤아리는 이른바 국책사업의 예산누수는 구조적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급하면 달러를 빌려온다.
이러고도 빚덩어리 나라가 안된다면 이상하다. 전국의 지방자치단체가 안고 있는 빚이 24조원을 넘는 곡절도 알만 하다. 국민의 부담을 더욱 키우는 공기업과 각종 연기금의 부실도 예산파먹기와 무관하지 않다.
회계법 운용기준은 예산의 낭비, 변태지출, 비효율적 집행 등으로 혈세를 축낸 사람들에게 너무나 관대하다. 책임을 묻는 사람도 지는 사람도 거의 없는 정부다. 이 또한 세도(稅盜)현상이다. 민간기업의 경영책임은 따지면서 예산을 뭉텅이로 날리거나 삼켜버린 공무원과 관련 이해집단 사람들은 문책하지 않는 것은 말이 안된다. 정부는 예산집행시스템을 혁명적으로 고치고 예산정보를 모두 공개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제2의 건국’도 YS정권의 ‘신한국 창조’처럼 허망하게 소멸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싶다.
배인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