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작을 한 사실이 있지만 ‘1만원’짜리였습니다.” “돈을 꿔준 일은 있지만 제 자신이 그렇게 많은 돈을 도박에 쓸리가 있나요.”
3일 오전10시 서울지법 형사법정. 수의(囚衣)차림의 한 피의자가 검찰의 신문에 들릴락말락한 소리로 이같이 답하고 있었다.
잔뜩 움츠린 구부정한 어깨에 1백60㎝가 채 안돼 보이는 왜소한 모습. 한때 ‘슬롯머신 대부’라고 불렸던 정덕진(鄭德珍·57)씨였다.
정씨 옆에는 재산도피를 도운 재산관리인 윤호중(尹浩重·70)씨, 원투어여행사 한국지사장 장찬식씨(36), 뇌물을 받고 외화밀반출을 묵인해 준 전 공항경찰대 통과여객담당 이종경(李種慶·40)씨 등이 나란히 서 있었다.
하지만 이날 정씨의 모습에서 93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슬롯머신 대부’의 당당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세인의 관심을 모았던 당시 재판은 약 1백50석 규모의 형사중법정에서 열렸고 박철언(朴哲彦)의원 이건개(李健介)대전고검장 엄삼탁(嚴三鐸)병무청장 천기호(千基鎬)치안감 등 거물들이 줄줄이 구속될 정도로 파괴력을 가졌었다.
하지만 이번 재판에서 정씨는 본인에게 내려질 형을 어떻게 해서든 낮춰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애처로운 모습으로 일관했다.
검찰에서 모두 시인했던 공소사실도 “재산관리인에게 돈을 좀 챙겨보라고 지시를 하긴 했지만 필리핀 마닐라로 가는 돈인지 몰랐다.”“돈을 직접 사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도박자금으로 빌려줬을 뿐”이라며 대부분 부인했다.
재판이 서울지법에서 가장 작은법정에서 방청객 10여명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썰렁하게 진행된 것도 정씨의 몰락처럼 비쳐졌다.
〈하태원기자〉scooo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