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늘 정치권의 관심은 여야총재회담의 성사 여부에 쏠리고 있다. 여야총재회담, 이른바 영수회담(領袖會談)이 능사는 아니지만 세풍(稅風) 총풍(銃風)공방을 둘러싸고 꼬일 대로 꼬인 경색정국을 풀기 위해서는 결국 그 길밖에 없다는 데 여야간에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것 같다. 문제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중국방문 이전이냐 이후냐이다.
▼비민주적 방식이지만
외국의 예를 자꾸 들먹이는 것은 유쾌한 일이 못되지만 정치선진국에는 우리처럼 전국민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식의 영수회담같은 것은 없다. 하기야 이웃 일본에서도 총리대신이 야당당수를 만나는 일이 있기는 하다. 회동의 명칭도 ‘영수회담’(료슈카이단) 그대로다. 일본이 경제선진국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렇다고 정치선진국인지 여부를 따진다면 이론(異論)이 있을 수 있다.
미국의 경우는 아예 당수(黨首)제도 자체가 없다. 주요 국정현안이 있을 때 원내총무를 비롯한 여야 의회지도자 10여명씩을 함께 불러 설명하고 로비하는 일은있어도대통령이야당지도자와 1대1로 직접 만나 시국현안을 논의하는 일은 찾아보기 힘들다.
의회정치의 본산이라는 영국도 마찬가지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국회 대정부질문시간 때면 국정최고책임자인 총리와 제1야당 당수가 국회의장 앞에서 격론을 벌이곤 하지만 다우닝가 10번지 총리관저같은 데서 두사람이 별도로 만나 ‘허심탄회하게 국정을 논의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미국이나 영국이라고 여야간에 합의로 풀어야 할 국정현안들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 여야가 매사에 손발이 척척 맞아 아무 다툼없이 국사가 처리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사안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첨예한 의견대립이 있을 수 있고 정국 또한 뒤틀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같은 영수회담이 없는 것은 한 두사람의 결단에 의한 인치(人治)가 아니라 소정의 절차에 따라 문제를 거르고 풀어나가는 민주적 문제해결방식이 제도화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해결 위한 차선책
일단 선거로 승패가 판가름나면 4년이든 5년이든 위임받은 기간에 집권세력은 최선을 다해 소신껏 국정을 책임지는 것이다. 야당 또한 건전한 반대세력으로 차기 집권을 염두에 두고 건설적 비판과 대안제시에 최선을 다하고 다음번 선거때 국민의 심판과 선택을 받는 것, 이것이 바로 민주적 정당정치의 요체다. 영수회담은 이런 이치에 맞지 않다.
생각해보면 ‘영수회담’이라는 용어부터가 비(非)민주적이다. 다분히 봉건적이고 권위주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열강이 각축전을 벌이는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도 아닌데 이쪽 저쪽 정치진영을 대표하는 거두(巨頭)들이 거창하게 회합을 하고, 건곤일척(乾坤一擲) 담판을 벌여 일거에 ‘대타협’을 이끌어내는 식의 문제해결방식은 확실히 전근대적인 정치행태가 아닐 수 없다. 어느모로 보나 민주주의적 절차 방식이라고 이름붙이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은 원칙론만 들먹이고 있어도 좋을 만큼 나라형편이 한가롭지 못하다. IMF가 아니더라도 안팎사정이 급박한데 언제까지나 편싸움 대결정치로 국력을 낭비하고 있을 수는 없다. 한국적 정치현실에서 달리 유효한 수단이 없다면 비록 또한번의 편법이기는 하지만 빨리 영수회담을 열어 돌파구를 마련하고 정국을 정상화해야 한다.
또 기왕에 영수회담을 열 요량이면 대통령의 중국방문 이전에 성사시키는 것이 여러모로 바람직하다. 정치를 바로 세우고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여야가 서로 협력해 나가기로 합의하고 해외순방길에 오른다면 발길은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與野 명분싸움 말아야
여건조성 문제로 막판 진통을 겪는 모양이나 애써 찾아보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마지막 남은 걸림돌은 총풍사건에 대한 이회창(李會昌)총재와 한나라당의 입장 재정리 여부라고 한다. 만사 제쳐놓고 “수사결과를 지켜보자”는 말 한마디면 금방 영수회담이 성사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지극히 원론적인 이 한마디가 그렇게 어렵다고는 보지 않는다. 진상이 가려지기도 전에 이총재측 연루설을 기정사실화하며 몰아쳤던 여당도 “그것은 불찰이었다”고 함께 사과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모양은 더욱 좋을 것이다. 여든 야든 감정이나 명분싸움 때문에 모처럼의 기회를 다시 위기로 몰아가는 우(愚)를 범하지 말기 바란다.
남중구(논설주간)